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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7. 2023

이별하고 돌아앉은 당신과 나

< 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

아무리 이별의 슬픔을 떠들어봐도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이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것이다.      


저마다 처음인 듯 사랑을 하면서도

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저런 과거가 있겠지만

내 앞에선 미소를 짓네요     


어느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특별한 문장이 아닌데 무언가 들킨 듯 참 와닿는 구절이다. 단어 중에 ‘쓰라린 이별’, 이 표현도 맘에 든다. 친구나 동료, 가족과의 이별은 쓰라리기보다 좀 더 묵직하지 않은가. 육체적인 상처로 예를 들자면 아마 길가에 넘어져 무릎이라도 깨졌을 때 벌겋게 벗겨진 살갗에 스며드는 첫 번째 소독약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랑과의 이별은 더 직접적이고 몰입형이고 실감형이다. 바로 어제까진 서로에게 둘도 없었던 소중한 존재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게 참 거짓말 같기도 한 것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은 보통 서로의 일상을 지배하며 깊게 공유되어 있다. 얽힌 실타래를 풀 듯 24시간,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시공간을 억지로 분리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옛날이야기를 하자면, 그땐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어서 이사를 가거나 전화번호가 바뀌면 물리적인 이유 때문이라도 다시 만나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닌 다는 것은 일정하게 오고 가는 장소가 있다는 의미이니 그 사람의 소속에 전화를 하는 것이 더 쉬웠다. 각자 방에 전화가 있지 않았던 집이 많았으므로 상대가 연락을 하지 않을 때 우린 그렇게 그가 다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하곤 했다. 그래서 받기 싫은 전화가 걸려올 땐 함께 있던 옆 사람이 부재중이라는 통보를 해야 했고, 그 소식을 몇 차례나 확인한 후에야 전화한 쪽은 만남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답답하고 막막했지만 이별하고 나면 지금처럼 상대의 소식을 알아보거나 확인할 길이 거의 없어 어쩌면 더 잊고 잊히기는 쉬웠던 것 같다.      


나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해 놓고 나가지도 않고 연락을 받지도 않는 방식으로 상대를 포기시킨 적이 있다. 바로 앞에서 이별을 진행하자 할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다시 얼굴을 보면 헤어지기가 힘들 것 같아 그렇게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못된 짓이었다. 상대를 배려하긴커녕 내 감정 위주로 나 편한 방법으로만 관계를 정리하고자 한 것이니 말이다.      


어떨 땐 이별하고 나서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에 화 한번 내지 않고 위선을 떨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척한 적도 있다. 어차피 깨어진 유리잔이라 풀로는 붙이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잘할 수 있다고 우리는 문제없다고 억지를 부린 적도 있다. 분명히 헤어졌으면서도 그 후로 몇 번 더 만남을 가지고선 그제야 서로 식은 마음을 확인한 적도 있다. 진짜로 헤어질 생각이 없었으면서 상대에게 헤어지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도 있다.      


어떤 이는 만나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헤어질 순간이 그려져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 헤어져 버린 적도 있다. 어이없게도 만남의 시간과 강도에 비해 너무나 쉽게 서로를 버린 적도 있다.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실감이 나지 않아 혼자서 이별을 인정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어쨌든 나는, 우리는 때론 서툴게 그리고 가끔은 익숙하게 이별을 해왔다.      


그리곤 나이 들어보니 이별은 서로 공평하게 아픈 것이지 어느 한쪽이 더 아프고 덜 아픈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또 당시의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상대와 헤어지는 것으로 발생하는 나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고통과 괴로움인 것이지 상대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의 크기가 크다고 생각하니까 슬픔의 강도가 세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젊었을 때 연애와 이별은 얼마나 큰 사건인가. 하지만 죽을 만큼의 절망스러운 시간이니 절절한 아픔이니 하는 것도 실은 아주 이기적인 본능의 감정일 뿐 결코 영원하거나 실체가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들 서로 죽고 못 살았으나 헤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별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이와 또 다시 죽을 만큼의 사랑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 나이가 들면 덜 아프고 덜 슬플까.      


병원에서 주사를 맞을 때를 떠올려본다. 살면서 주사를 많이 맞아 봤고, 어떤 종류의 아픔인지 뻔히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맞을 때 안 아픈 것은 아니듯이 이별도 많이 해봤다고 해서 다음번 이별이 그전보다 덜 아픈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별을 많이 해보고 상대를 통해 나라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입체적으로 확인하였으므로 조금 더 나은 이별, 이별 후 더 성숙한 시간, 아픔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성과는 나이만큼 얻었다 믿고 싶다.      


나이가 들면 절절한 사랑 같은 확실한 감정 말고도 다른 감정들을 많이 겪게 된다. 꼭 빨강이 아니라 연한 빨강이나 분홍, 아니면 그와 이웃인 주홍이나 주황도 보고 듣게 된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것들은 패키지로 싸서 그냥 붉은 보따리로 묶게 된다. 그래서인지 돌아보면 이별도 스쳐 지나간 그런저런 과거가 되고 당신 앞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다. 신기하게도 우린 그토록 아팠던 이별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결국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이토록 확실한 삶의 이치를 부디 믿고 죽도록 사랑한 그 사람과의 이별에 그만 절망을 거두시라.    

  

사랑은 다시 오고, 이별도 덮어진다. 사랑이 가고 이별이 다시 와도 우린 다시 살 수 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은 괴로움도 결국은 사라진다. 그렇게 돌아와 앉은 나와 당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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