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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Dec 28. 2023

처음 고백

< 기획자의 저녁 _2 >

 오늘 만난 불특정 다수의 인물, 사업과 관련이 없는 비관계자에게 내가 구상한 기획안을 설명해 보라.   


  기획자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구상안을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하기를 가장 여러 워 한다. 기획자가 아니어도 핵심을 요약해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떨 땐 기획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훨씬 더 전달을 잘할 때도 있다. 당사자는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오랜 시간 헤어져 갑자기 만나면 너무나 할 말이 많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치와도 같다. 대체 나는 한 달 이상 공부했는데 그걸 어찌 단 몇 줄로 요약하라는 말인가 싶다. 그래서 처음엔 대부분 서론과 배경 설명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깊은 뜻을 나만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알겠나 싶어 공감 못하는 상대의 수준을 탓하곤 한다. 그러면 화를 내게 되거나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신입시절에 임원들 앞에서 구상안을 설명하다가 맨날 그래서 결론이 뭐냐는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      


  또 기획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순서가 확연히 있는데, 누군가 치고 들어와 말을 자르거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갈 경우, 본인 의도대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음에 무척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로 인해 무슨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인데, 주로 윗사람이 끝까지 듣지 않고 말을 툭툭 자르거나, 자기 하고 싶은 질문을 두서없이 해버리면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결론까지 가기도 전에 하다만 보고가 되기 쉽다.      


  “제가 한 번만 전체 설명을 드릴 텐데요. 길지 않으니 끝까지 들어주시고 질문해 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이렇게 미리 말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이 말은 꽤 효과가 있어 내 순서대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사실 기획자에게는 기획내용을 최대한 요약해 설명하라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싫다. 하지만 기획자는 한 번으로 그 설명을 완벽하게 할 수 있어야 다음 어느 자리 누구에게도 같은 내용을 똑 부러지게 전달할 수 있다. 그 최초의 한번. 그런데 그 처음 고백의 대상이 같이 작업을 한 팀원들이거나 내부 임원, 혹은 협력사, 발주처라면 보다 쉽다. 그들은 기본지식이 있고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충분히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멋있게 설명을 할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만약 사전 지식이 없는 오늘 나를 만난 사람이라면 어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느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할 것인가.      


   나를 알지 못하는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지식과 지능을 가진 친구가 내 이야기에 공감했다면 그건 분명 괜찮은 생각이다. 모든 기획안이 마무리된 상태에서는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상대에게 한번 설명을 해보는 것이 좋다. 어려운 내용일수록 더 좋다. 만약 상대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면 조금 더 수준을 낮추어 전달해야 한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높이를 깨닫게 된다. 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알아듣건 말건 열심히 기획안을 설명하고 보여주고 그랬다. 아직 얼개가 완성되지 않은 아주 초기 단계의 아이디어 정도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달려가 출근하자마자 피 튀기는 설명을 하곤 했다. 동료들은 내가 설명을 할 때 눈이 반짝반짝한다고, 타고난 기획자라고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나는 이 최초 설명을 듣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왜냐하면 내가 맨 처음, 구상한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열정적이며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좋은 반응을 보일 때 가장 기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때 너무나 속상하곤 했다.      


  사람들은 저녁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래도 내 생각만큼 그리 깊게 귀를 쫑긋하고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간결하고 핵심만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도 쉬고 싶을 때 공감을 얻어내었다면 그 기획안은 성공적이다.      


  나는 그렇게 저녁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갑자기 훅, 이런 내용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하며 지적인 대화를 이어가자 조르고 사람들을 귀찮게 하곤 했다. 사실 사람이 설득하거나 설득당하기 가장 좋은 시간대는 이른 아침이나 점심을 먹은 직후라고 한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가장 체력이 좋을 때, 그리고 마음이 좀 여유로울 때. 하지만 그 시간대는 앞서 언급했듯이 나의 집중에 방해되는 소스를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 나는 어쩌면 첫 고백에서는 어떻게든 거절을 당하기 싫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연락을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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