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밀러의 장편소설 <키르케>에서 불행한 인간과 행복한 인간, 둘 중에 누가 더 제물을 열심히 바치겠냐며 헤르메스가 키르케에게 묻는다.
키르케는 당연히 '행복한 인간'이 제물을 열심히 바칠 거라 대답했다.
하지만 틀렸다.
헤르메스의 대답은 "행복한 인간은 열심히 사느라 정신이 없어. 아무한테도 신세를 진 게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를 쓰러뜨리고 아내를 죽이고 아이를 불구로 만들면 저절로 소식이 들린 거야. 온 가족을 한 달 동안 굶겨가며 새하얀 한 살배기 송아지를 제물로 바칠 거야. 여건만 허락한다면 백 마리도 사서 바칠걸."
신들은 우리를 괴롭게 해서 제물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척 착한 척 하지만 결국엔 신들은 인간들을 괴롭힐 방법만 궁리한다고 헤르메스가 말한다.
과연 신들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재밌고 유익해할까?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인간은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일 때가 많다. 요즘처럼 정치와 경제가 어렵고 세계의 질서가 혼란 해질 땐 더욱 그렇다. 약자가 제일 피해를 많이 본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길 바랄 텐데 우리를 힘들게 해서 제물을 받을 생각만 한다는 소설 속 논리는 틀렸다.
때론 결핍으로 인해 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없기에 더 가지고 싶어지는 심리가 있다.
실패했기에 다음번엔 꼭 성공하고 싶어 한다. 비워있는 것을 가득 채우려 한다. 불행하면 행복을 더 갈구한다.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없는 것만 보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행복했다면 그다음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일 가능성이 높다. 행복할 땐 모든 것이 내가 잘해서 행복하다고 여기기 쉽다. 겸손보다는 오만해질 가능성이 높다.
불행 다음엔 정말 행복일까? 그것은 불행을 이겨내는 태도에 달렸다고 본다.
행복을 향해 가는 사람처럼 꿋꿋하게 이겨내는 자만이 불행 다음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나는 불행한 상태인가? 행복한 상태인가?
불행했었다. 3년 전까지는... 가장 믿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찾아 나섰다. 내가 잘하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나를 위하는 사람들만 보았고 의지했다.
조금씩 숨이 쉬어졌다. 숨이 쉬어지니 걸을 수 있었고, 마침내 뛸 수도 있게 되었다.
신에게 납작 엎드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신에게 재물을 바치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불행한 나의 삶을 모두 신에게 내어 맡기며 신의 동행을 갈구했다.
어려운 일을 겪고 나서 나의 기가 한풀 꺾인 것을 느낀다. 나도 잘 못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 더 많이 인정하게 되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키르케> 소설에서 마녀 키르케는 인간을 신으로 만들 수 있고, 신을 괴물로 만들 수 있는 주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위협을 느낀 제우스가 무인도로 추방을 한다.
추방당한 섬에서 키르케는 비술을 연마하고, 야생 짐승을 길들이고,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를 만나 오디세우스의 아들을 낳기까지 한다.
정체하지 않고 힘든 시기에 더 주술을 연마하는 키르케는 어려운 시기에 닥칠 때마다 비술의 능력으로 힘든 여정을 이겨낸다. 결국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여전사 같은 마녀 키르케가 된다.
불행했기에 더 노력하고 연마한 덕분에 신에게 대항할 수 있었고, 아들을 지켜냈으며, 결국 무인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희망이 보였다. 우리의 삶도 불행의 연속이지만 그 불행 속에서도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갈고닦는다면 분명 결국엔 희망하는 것을 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은 제물을 받기보다는 성공과 희열의 감정을 받고 싶어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