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겹의 종속. 아래가 없는 자리
상편에서 법과 구조를 봤다. 하편에서는 구조 안의 사람을 본다.
여성 노비에게 주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남성 주인이 있었고, 여성 주인이 있었다. 남성 주인은 노동을 시키고, 체벌을 하고, 밤에는 성적 대상으로 삼았다. 여성 주인은 어떠했을까.
여성 주인 — 안주인은 남편이 여종을 범해도 항의할 수 없었다. 칠거지악 중 하나가 "질투(嫉妬)"였다. 남편의 다른 여자에 대해 질투하면 쫓겨남의 사유가 됐다. 남편이 여종과 관계를 맺어도 아내가 화를 내면 "투기"로 분류돼 아내가 쫓겨날 수 있었다. 법이 아내의 분노를 금지한 것이다.
남편에게 화를 낼 수 없으면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아래로 간다. 여종에게 간다. 남편이 관심을 보인 여종을 안주인이 때린다. 매각한다. 외거노비로 내보낸다. 이것은 "질투하는 악처"의 이야기가 아니다. 분노할 곳이 남편밖에 없는데 남편에게 분노하면 자기가 쫓겨나므로, 유일하게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인 여종에게 분노가 향한 것이다.
궁 시리즈 9편 "내명부의 위계"에서 미세 권력을 다뤘다. 상궁이 나인에게 권한을 행사하듯, 안주인이 여종에게 권한을 행사한다. 위에서 받은 무력감을 아래에서 보상하는 구조. 안주인도 억압받는 사람이다. 남편에게, 시부모에게, 칠거지악이라는 법에 묶여 있다. 그러나 여종 앞에서는 절대적이다.
여종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다. 남성 주인에게 강간당하고, 여성 주인에게 맞는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가 처벌받는다. 현대 심리학에서 "이차 피해(secondary victimization)"라고 부르는 구조다. 1차 피해보다 2차 피해가 더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1차 피해는 "당한 것"이지만, 2차 피해는 "내가 잘못한 것인가"라는 자기 의심을 만든다.
여성 노비에게 안주인의 학대는 2차 피해다. 강간당한 것이 자기 탓이라는 메시지를 같은 여성에게서 받는다. 같은 여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남성에게 당한 것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지만, 같은 여성에게 당한 것은 처리할 곳이 없다.
이 에세이에서 이문건 가의 여종 향복의 사례를 본다. 향복은 주인집 도령에게 세 차례 강간당했다. 주인 이문건은 이 사실을 알고도 도령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며칠 뒤 "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전했을 뿐이다. 반면 향복은 강간당할 때 소리쳐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이후 향복은 딸을 낳았으나 아비가 누구인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는 향복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됐다.
강간한 남성은 "색을 경계하라"는 훈계를 받았다. 강간당한 여종은 쫓겨나고, 구타당하고, 아이의 아버지를 잃었다. 이것이 법이 만든 현실이다.
여성 노비의 트라우마를 다섯 층위로 정리한다.
첫째, 몸의 이중 소유. 낮에는 노동하는 몸이고, 밤에는 성적 대상이 되는 몸이다. 같은 몸이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이것이 지속되면 자기 몸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몸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이 사라진다. 기생은 기방 안에서만 성적 대상이었고, 기방 밖에서는 아니었다. 여성 노비는 모든 공간에서 성적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피할 공간이 없었다.
둘째, 법적 무력감. 고소할 수 없다. 항의할 수 없다. 도망치면 잡힌다. 어떤 행동을 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없다. 법이 막고 있으므로.
셋째, 전가된 분노. 남성 주인의 폭력 위에 여성 주인의 분노가 겹친다. 가해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고, 피해를 호소할 수 없고, 같은 여성에게서 비난을 받는다. 삼면이 막혀 있다.
넷째, 출산이 종속을 재생산한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노비가 된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도 노비가 된다. 생명을 만드는 행위가 종속을 강화한다. 5편에서 처녀귀신의 "미완의 과업"을 다뤘다. 여성 노비에게는 반대의 역설이 있다. 과업을 완수할수록(아이를 낳을수록) 종속이 깊어진다. 아버지가 양반이어도 "내 아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아버지의 노비가 된다. 인정하면 얼자(孼子)가 된다. 얼자는 아버지의 피가 흐르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같은 집에 살면서 적자의 10분의 1만 상속받는다.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얼 자의 딸은 양반의 정실이 될 수 없으므로 다시 첩이 된다. 어머니가 첩이었으므로 딸도 첩이 된다. 세대를 넘어 순환하는 구조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얼자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는 탄식이 이 구조에서 나왔다.
다섯째, 침묵.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 고소할 수 없고, 안주인에게 항의할 수 없고, 다른 노비에게 말해도 바뀌는 것이 없다. 2편에서 무당의 몸을 다뤘고, 4편에서 "남의 슬픔을 대신 우는 직업"을 다뤘다. 무당은 남의 한을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여성 노비의 한을 풀어줄 무당이 있었을까.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5편에서 처녀귀신이 "죽어서야 말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여성 노비는 죽어서도 말할 수 없었다. 처녀귀신은 이야기로 남았다. 여성 노비의 이야기는 귀신 이야기로도 남지 않았다. 귀신이 되려면 이름이라도 있어야 한다. 여성 노비에게는 이름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기생은 자유가 없었다. 여성 노비는 자유도 없었고 자기도 없었다. 기생은 기방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여성 노비는 자기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기방은 나갈 수 있다. 퇴기되면 나간다. 몸은 나갈 수 없다.
이 시리즈의 제목이 《이름 없는 자리》다. 천민의 자리에 이름이 없었다. 그 안에서 여성 노비의 자리는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이름 없는 자리 안의 이름 없는 자리.
밤이 되면 그 자리가 보인다. 낮에는 노동에 묻혀 보이지 않던 것이 밤에 드러난다. 노비의 밤은 낮보다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