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의 아내

남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리

by 응시

백정(白丁)은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소와 돼지를 잡는 사람. 도축이 직업이었다. 사람들은 백정을 필요로 했다. 고기를 먹으려면 누군가 잡아야 했다. 그러나 잡는 사람을 멸시했다. 필요하되 멸시하는 구조. 무당과 비슷했다. 굿이 필요하되 무당을 멸시하는 구조와 같았다.


백정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백정의 아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백정 자체의 기록이 적은데, 백정의 아내는 더 적다. 남아 있는 것은 간접적 흔적뿐이다. 백정 가문이 마을 바깥에 살았다는 기록. 백정의 자녀가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기록. 이 기록에서 아내의 삶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백정의 아내는 대개 백정 가문의 여성이었다. 백정과 양인의 혼인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양인 가문이 백정과의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백정은 백정과 결혼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제한이었다. 선택지가 백정 가문 안에만 있었다.


여기서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구조가 보인다.


현대 심리학에서 '연좌된 낙인(courtesy stigma)'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와 관련된 사람 때문에 낙인이 붙는 것이다. 정신 질환자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위축되는 것, 범죄자의 자녀가 편견에 시달리는 것. 본인이 한 것이 아니지만, 관계 때문에 낙인이 옮아온다.


백정의 아내는 연좌된 낙인의 전형이다. 이 여성이 소를 잡은 것이 아니다. 도축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백정의 아내라는 이유로 같은 멸시를 받았다. 마을에서 배제됐고, 아이가 차별받았고, 일상의 모든 곳에서 "백정의 아내"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닌 일 때문에 벌 받는 경험. 이것이 반복되면 두 가지 중 하나가 일어난다.


하나는 분노다. 부당하다는 감각. "내가 한 것이 아닌데 왜 나에게." 이 분노가 유지되려면 부당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인식하려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삶을 알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수용이다. "원래 이런 것"이라는 인식. 1편에서 다뤘던 낙인의 내면화와 같다. 낙인이 내면화되면 분노가 사라진다. 부당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백정의 아내가 분노했는지, 수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역사적 사건이 힌트를 준다. 1923년, 백정들이 형평사(衡平社)를 만들었다. 신분 차별 철폐를 요구한 조직이다. 이것은 백정이 낙인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분노가 있었다. 부당함의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형평사가 만들어진 것은 1923년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된 지 29년이 지난 뒤였다. 법이 바뀌었는데 왜 29년이나 걸렸을까. 법은 바뀌었으나 사람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분제가 철폐된 뒤에도 백정의 호적에는 "도한(屠漢)"이라 기입됐다. 입학 원서, 관공서 서류에 그 글자가 따라다녔다. 진주의 백정 이학찬은 아들을 공립학교에 여러 번 입학시키려 했다. 거절당했다. 야학교에도 거절당했다. 사립학교에도 거절당했다. 돈은 있었다. 신분이 문제였다. 법은 신분을 없앴지만, 사람들의 기억은 신분을 지우지 않았다. 이학찬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양반 출신 강상호와 조선일보 지국장 신현수를 찾아가 호소했다. 이것이 형평사 창립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형평사 축하연이 열렸을 때, 기생조차 오지 않았다. 기생은 천민이다.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백정이 있었다. 기생이 백정보다 위라고 여긴 것이다. 노동자와 빈민까지도 형평운동에 반대했다.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위에서 받은 무력감을 아래에서 보상하는 구조. 궁 시리즈 9편에서 다뤘던 미세 권력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백정의 아내는 이 모든 것을 남편의 옆에서 겪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것을 겪었다. 마을에서 격리된 채 사는 것을 겪었다. 법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시선을 겪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기 이름이 아니라 "백정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겪었다.


형평사 운동에 백정의 아내가 참여했는지는 기록이 드물다. 남성 백정의 이름은 남아 있다. 여성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리즈의 모든 편에서 반복되는 구조다.


백정의 아내는 두 겹의 낙인을 안고 살았다. 천민이라는 낙인과 백정의 아내라는 낙인. 첫 번째는 자기 신분에서 왔고, 두 번째는 남편의 신분에서 왔다. 자기 것이 아닌 낙인이 자기 것이 되는 구조.


이름이 없는 자리. 남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리. 백정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