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스즈에와 미치루
미치루를 만난 건 아마 창씨개명을 하러 갔을 때였던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기억할 수 있지만 어쩌다가 이 인연이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갔는지 모르겠다. 요컨대,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건 이미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을까. 그게 아니라 분명 나의 기억력이 안 좋아서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창씨개명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나는 갑자기 울분과 서러움이 만감을 교차하는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건지에 대한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령강이라는 이름 대신, 스즈에라는 이름으로서의 인생이 보나 마나 어두운 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스즈에든 령강이든 내 삶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아니지만 인생에 별 지장은 없었다. 스즈에로서의 인생이든, 령강으로서의 인생이든 나는 나였다.
어릴 때 독립 운동을 하던 언니의 영향으로 아무래도 애국심이 넘쳐 흘렀던 탓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이미 스즈에로서의 삶을 체념하고 받아들인 내가 언니와의 관계가 흐트러진 건 아니다. 여전히 언니와는 곧 잘 어울리곤 하고 있고 대화도 그럭저럭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실, 창씨개명은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 한 게 아니었다. 엄마도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지 오래였고 아빠도 케이이치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언니였다. 언니는 평강(平江)이라는 이름으로서의 인생을 아주 잘 살고 있다. (언니가 만약 창씨개명을 했다면 히라에(ひらえ)였을 것이다.)언니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는 게 취미였고 글을 쓰는 데에도 재능을 보여서 최근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문학과로 수석 입학하여 잘 살고 있다. 그런 언니가 부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성적이 좋지 않아 상업 고등학교로 입학했지만 나름 성적도 우수하고 교내 대회에도 많이 참가해서 수상 경력도 어느 정도 쌓여 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하루가 또 지나가고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심심하면 미치루를 불러 놀곤 했다.
미치루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지만 그 때문인지 몰라도 미치루의 성격은 사납고 극도로 예민했다. 초기에는 그런 미치루 때문에 울기도 하고 화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미치루의 성격도 많이 죽었다면 많이 죽어서 다행이리라.
미치루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태어날 때부터 병원에서 말한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나 보통 아이들보다 무게가 덜 나갔다고 했다. 크면서도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내가 훨씬 더 잔병치레가 많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미치루도 나의 의견에 동의하며 사실은 부모님이 자신이 외동이라서 너무 애지중지 키우느라 별 일도 아닌데 호들갑을 떤 것뿐이라고 애써 웃으며 말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미치루를 보며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미치루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아직도 있겠지만 칠 년이라는 세월을 옆에서 지켜 봤을 때, 역시 미치루 쪽이 잔병치레가 더 많은 것 같다고 느꼈다.
어느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장마라서 비가 오는 날이 잦아졌는데 유난히 습도가 높고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햇빛은 마치 천지창조라도 하듯이 탁한 구름 사이의 틈으로 한 줄기씩 내려왔다. 나는 그 광경이 최근에서야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자연의 신비를 느끼는 것이었다.
어쨌든 간에, 비가 오는 밤에 미치루가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미치루의 모습에 놀라서 얼른 집안으로 들어 오라고 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실례라며 이미 밤 늦게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거절했다. 그러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니 미치루가 하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스즈에, 나 사실은 가출했어······.”
나는 너무 놀라서 이유를 물어보니 미치루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 실은, 말하기 좀 그래.”
나는 미치루의 대답에 어쩔 수 없이 이유를 캐물을 수가 없었고 할 말을 잃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미치루를 집으로 끌고 들어오게 만들어서 일단 수건이라도 줘서 말렸다가 비가 그치면 돌아가라고 하려고 하니 미치루는 애써 거절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나는 미치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꼭 집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더니. 우연인지 뭔지 몰라도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정전이 일어나고 창밖이 번쩍하고 빛이 났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 이상한 쥐 가면을 쓴 어떤 사람이 내 방 창문 쪽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중심을 잘 잡고 있어서 넘어지는 상황은 면했지만 밖에 있는 저 이상한 생명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방금 전 홀로 미치루를 보냈던 게 생각이 나서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밖을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너무 무서워서 나갈 용기가 없었다. 온갖 부정적인 사고들이 머릿속을 헤엄치고 다니던 중에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상한 생명체는 돌아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듯해서 등줄기에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지 못해 용기를 내어 “누구야!”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그 이상한 생명체는 가면을 벗더니 다시 한 번 더 유리창을 두들겼다. 공포심이 드는 와중에 약간의 호기심과 저 녀석이 대체 누구인지는 알아야겠다 싶어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긴생머리에 삼백안 눈을 가진 익숙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야!”
“헤헤, 놀랬어?”
“놀래고 말고 너 가출했다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건 뻥이었어. 그걸 믿네, 스즈에는.”
불행 중 다행인지 그 이상한 가면을 쓴 수상한 사람의 정체는 미치루였다. 미치루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까지도 그건 미궁 속에 남아 있지만 그저 철없을 시절의 그것에 걸맞는 장난을 쳤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그날 미치루는 천벌을 받은 것일까. 나는 그날 권선징악의 실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장난을 치래? 벌 받은 거야.”
나는 비에 졸딱 맞아 결국에 몸져누워 버린 미치루 곁을 지키며 잔소리를 했다. 아무리 한자라지만, 아무런 병자이지만 확실하게 짚어 가야할 건 있는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치루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듯 그저 헤헤 하고 웃을 뿐이었다.
“있잖아, 스즈에.”
“왜 그래, 미치루.”
“너 열 나 본 적 있어?”
“당연하지. 나도 은근 너만큼 잔병치레가 얼마나 심했다고.”
“그렇니? 아무튼 간에 열이 나면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 회전목마를 타면 이런 느낌일까.”
“글쎄. 타본 적이 없어서.”
“애초에 우리가 회전목마를 탈 일이 있을까?”“그러게.”
“일본에는 놀이동산이라는 게 있대. 스즈에는 알고 있었어?”
“응. 당연하지.”
“그래, 그럼 나중에 내가 일본에 유학가게 되면 한 번 타보고 소감을 들려줄게.”
“그러든지.”
“너는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해.”
“갑자기?”
“응, 너는 나보다 명줄이 길어. 나 같은 인간한테는 그런 게 보여. 그러니까 너는 나보다 뒤에 와야 돼. 그때도 내가 먼저였던 것처럼.”
“그때?”
“기억 안 나? 우리가 스즈에와 미치루가 되기 전에 말이야.”
“아아.”
“나는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들어. 촌스럽게 영이가 뭐야. 영이가.”
“왜. 좋구먼.”
“그런가? 아무튼 너는 나보다 오래 살아야 돼.”
“무슨 소리야. 내가 훨씬 너보다 명줄이 짧거든.”
“흥, 글쎄다.”
“그러니까 너도 오래 살아, 미치루.”
그렇게 말하니 미치루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대며 웃어 보였다. 솔직히 미치루가 이런 말을 하는게 처음이 아니었고 가출했다고 믿은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미치루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서 나와는 다르게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학교에 빠지는 일이 허다해졌고 그에 따라 성적도 형편없어졌다.
마치 나와 미치루는 거울과도 같았다. 거울에 비춰지는 글씨는 미치루지만 스즈에였고 반대로도 마찬가지로 거울에 비춰지는 글씨는 스즈에였지만 미치루로 거울에 비춰지는 사람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비춰지는 이상한 거울이었다.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미치루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며 신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그저 안타까웠달까. 아니, 이건 쓸데없는 동정과 연민일 뿐이라며 애써 이 씁쓸한 감정을 감추고 그 감정으로부터 회피하고 도망쳤다.
미치루에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너무 회피형 인간이야.”
맞는 말이었다. 미치루는 사람을 잘 꿰뚫는다. 사람을 꿰뚫는다기 보다는 상상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은 것이지만 말이다. 나쁘게 말하면 망상이 너무 심하다. 그건 미치루 본인 스스로도 인정했다.
나답지 않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미치루 어머니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그렇게 잠든 미치루를 뒤로 하고 유유히 미치루의 집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