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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월 Aug 16. 2024

[논픽션 소설] 인간실격

우울증이 중증이었을 무렵 나의 이야기

2월 중순의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아니,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우려하고 있었던 일이, 제 인생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을 운명이, 빌어먹을 우연이 일어났습니다.


시작은, 언제부터였을지 모를, 어쩌면 이것 또한 정해져 있었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요. 제 기억상으로 어림잡아 지금으로부터 3~5년 전부터였습니다.


제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저는 무엇인가 깨달았습니다. 제가 절대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요컨대 저는 그때부터 조금씩 현실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은 저를 점점 초라하게 만드는, 리얼리즘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실종된 채, 그래봤자 한 십대 소녀의 가출 소동 일기에 불과하겠지만, 이 글을 유서 마냥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제 모든 순간과 기억을, 과거를 읊을 여유라곤 없을 것 같으니 당장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의 일, 즉 현재 (오늘)에 대한 이야기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다짜고짜 그렇게 시작하는 것은 느닷없을 수도 있으니,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찬찬히 설명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평소 신빙성도 없는 자가 진단으로 만성적인 우울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째서인지 평상시에는 잘 감추고 억눌러 왔던 것이, 그 곪은 상처가, 임시방편으로 막아 놓고 있던 상처가 벌어져 과다출혈을 일으켜 버렸습니다. 저 자신도 당연히, 당시에는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어찌할 수 없이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보란 듯이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꼬박꼬박 잘 다니던 학원도 빠질 만큼으로 말입니다. 지금은 아무렴 좋을 말이지만, 덧붙여서 저는 두 곳의 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곳은 영어 학원, 또 다른 한 곳은 수학 학원이었습니다. 저는 그중, 영어 학원을 딱 하루만 빼먹었을 뿐인데 그 후폭풍이 이리 클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워낙 그 학원 원장이 투철한 교육자 정신을 가지고 근심이 많은 분이라서 제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잠적해버리니 상황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녹다운과 반항심, 분노, 슬픔, 우울, 온갖 부정적이고 누긋한 감정을 느끼면서, 심지어 온갖 부정적이고 금방이라도 심신이 급격하게 약해져서는 그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도,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고독은 소용돌이쳤습니다. 아, 지금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긴 합니다만,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남이 아닌 가족한테까지도 이러고 있으니 참으로 몹쓸 짓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죽을 것 같은 공포심과 두려움에 늘 자기변호와 자기 합리화를 하곤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날 반나절이 지나고, 하루가 지난 다음 날에도 연락은 질리지 않고 끊임없이 오곤 했습니다만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마침 수학 학원에 가야만 하는 날인지라 수학 학원을 갔지만, 거기서 저는 역시 이미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물론 사실은 남들은 본디 남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비록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수학 학원에는 저와 같은 영어 학원에 다니는 제 또래의 남학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어 학원은 빠졌으면서 수학 학원에 당당히 오는 것은 무슨 심리인 걸까요.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요즘에는 질풍노도의 시기답게 저뿐만 아니라 다른 또래들도 이런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는 듯했습니다만 우습게도 기분 탓이거나 제 착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각설하자면, 수학 학원 원장 선생님도 그 소문을 들으셨는지 어제의 일을 아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놀랍지 않았습니다. 그 영어 학원 원장은 연락하는 게 취미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표현할 수 없는 이 이상한 감정에 못 이겨 눈물샘이 터져버린 것처럼 하릴없이 눈물을 흘리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그날도, 그 전날도 지금도 불안감과 불편함을 모조리 본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휘휘 저어놔서 마치 모든 물감의 색들이 섞여 무슨 색인지 모를 물통의 내용물과도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죠. 저는 누가 봐도 어떤 일이 저질러버린 불안감에 못 이기는 불행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딱 마침 그런 인간의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선생님은 제게 물으셨습니다.


“울었냐?”


저는 그 질문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당연, 눈병이라고 둘러댔고 수업 참여도가 좋았던 평소보다 수업과 관련된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시종일관했고 선생님은 그런 제게 화났냐고 물으시니 저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음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무슨 일이 있었어?”


저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한껏 수심이 깊은 얼굴을 이내 다시 애써 웃어 보이며


“아무 것도 아니야.”


친구는 제 행동과 대답이 무엇인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아채고선 확신에 찬 듯이 말했습니다.


“역시 너 무슨 일 있었지? 얼굴에 다 쓰여져 있어.”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습니다. 저는 난감하다는 듯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헤어질 때는 제 쪽에서 먼저 경계선을 긋듯이 차가운 어조로 “안녕”, “잘 가”라고 말하며 헤어졌습니다. 정확히는 그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을 뿐이지만 말입니다.


아, 중요한 말을 여태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영어 학원을 빠지는 날, 저는 두 팔목에 또 다시 하면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불감훼상에 위배 되는 행동을 말입니다.


*


다음 날, 속죄를 하고픈 마음에 여느 때와 같이 오는 영어 학원 원장의 연락을 받지 않고 뻔뻔하게 영어 학원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강의실에 앉은 채 수업을 기다리고 있으니 결국, 저는 수업 도중에 불려 나갔습니다. 저는 그때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부자연스러운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맥락에 맞지 않게 실실 웃으면서 해맑게 인사를 했던 것이었지만 선생님은 저를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듯이 고개를 한 번 저으시고는 걱정되는 눈빛을 보였습니다. 아아,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요. 이것은 마치 애증, 아니, 마치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환각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되었습니다.


*


그렇게 불려 나가고 나서 선생님은 제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연락은 왜 무시했는지 범죄자에게 심문을 취하는 형사인 양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랬으면 안 됐었지만, 저는 평소에 저를 제멋대로, 노력해도 성과를 이루지 못하는 착한 아이로 여기고 있었던 그분을 싫어했기에, 사실은 대부분에 사람이 저를 그리 바라보고 있었을 터이지만 애초에 그런 인간을 어떤 이유로 꺼렸기 때문에 비아냥대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싫어요.”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정상이 아니었던 제 태도에, 아니, 이상한 웃음을 띠고 있는 저를 향해 바라봤던 그 표정, 의아하다는 그 표정을 또다시 제게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에 사실대로 다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의 표정은 동정 어린 시선이 된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저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애증이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밖에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흔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애증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느끼는 것은 애증이었습니다.


*


저는 살려달라는 식의 호소를 선생님에게 했습니다. 저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우울을 권력으로 삼아서 늘 해결책이라고 오해받는 눈물을 보이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은 제게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았고 저는 사양했고 그저 털어놓은 모든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지만 말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을 테지만 저는 보다시피 지금 식구들을 피해 가출한 상태가 돼 버렸잖습니까.


*


오늘 시점으로 어제는 토요일, 일찍 가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니께서는 제게 같이 쇼핑을 하자고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을 때인데 저는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 제안에 응했습니다. 동네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가는 와중에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와 어머니는 친구처럼 지내는 관계였습니다만 그런 불편한 기색이 우리 사이에서는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어째서인지 어머니의 표정은 그날따라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셨고 눈가는 빨갛게 충혈이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셔서 갑자기 냅다 쇼핑하자고 하니 일을 마치고 피곤하셨을 법도 한데, 저는 거기서 이상함을 감지했습니다만 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점점 이 어색함과 이상함에 참지 못하게 된 저는 어머니와 의도하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채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기정사실로 번져가는 듯했습니다. 사실, 아직도 확신하기에는 그렇지만 제 자해 상처를 치료한 것을, 제가 잠이 들었던 틈을 타서, 제가 남겨둔 글들이 모든 정황으로 부모님께서 알게 되신 듯해 보였습니다. 그동안 어째서인지 가게에 가서 저녁을 먹으러 얼굴을 드러내는 걸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저녁 식사만큼은 다 같이 모여 먹도록 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온 식구가 다 있을 수 있는 가게에서 식사하는 게 아버지의 방침 아닌 방침이었습니다. 물론 가게 일이 바쁜 탓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아버지께 전해 아버지께서 노발대발 화가 나서 이를 제게 피하도록 일부러 가게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까지 저는 글을 쓰다가, 일주일 동안 이런 글들을 주야장천 써댔고 잠이 들었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건 분명

좋지 않은 일이라고 자각하고 있지만

새로운 해가 떠올랐을 때부터

불안하던 그 마음은

변치 않는 것 같은 그 감정은

오롯이 언제부터인가

아무개 과거로부터 그날까지, 지금까지

과거가 되어

역사라는 것을 써 내려가던가.


나는 외투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 도시의 밤 거리를 유유히 걸었다.

묵묵하게 걸어 도착한 곳이 없어야 할 터였지만

나는 이유도 모르는데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몇 십 년을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낡은 빌라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여기서 매일 일거일수투족을 보내는데

오늘은 어쩜 이리 그립고 정겹고 구슬픈 느낌이 드는 걸까.


속삭이고 바스락거리던 소리,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 부엌의 조리 기구를 달그락거리던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갖가지 생활음이 들리던 곳.

자각한 감정이 무뎌질 때쯤

그리워, 그리워서 나는 괜히 또 밖으로 나가본다.


2021년 11월 13일


*


그리고 또 다음 날이 야속하게도 밝아 왔습니다. 일요일이 되던 날, 이 글을 써 내려갔을 때는 오늘이기에, 오늘 낮에는 저는 주말인데 아침 일곱 시쯤에 기상해서 어제 쇼핑하며 사 왔던 크로아상이나 과자들로 대충 조식을 때우고 출근하시는 부모님을 뒤로 홀로 집에 남겨져 또 하릴없이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리며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참, 아버지께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말씀이 있다고 중요한 일이라며 말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어조로, 점심을 같이 들자며 연락이 왔던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운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눈을 뜬 채 세안했을 정도로 얼굴을 물로 깨끗이 씻고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진한 초콜릿색 코트를 걸치고 가게로 걸어갔습니다. 저는 어제와 다르게 어떤 확신이, 우려했던 현실이 점점 코앞으로 다가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두려움에 저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자기최면을 걸었습니다. 가게에 도착하니 두 분 사이 분위기는 마치 다툰 것 같은, 아니, 다툴 것 같은, 다투고 있었던 것 같은 묘하고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예상했다시피 이어폰으로 두 귀를 막고 가게에 있는 제 지정석, 늘 제가 그곳에 갔을 때 앉는 자리, 거기에 앉아 이번에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시든 간에 안 그래도 침울해 있던 감정이 더 격해져, 다시는 그 누구의 앞에서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한 제 나름대로, 최선의 수단이나 현실 도피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부터는, 여기서는 이어폰을 빼라며 주의했지만, 한쪽만을 빼고 계속해서 제 나름대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 들어오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책에 집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제게 점심 메뉴를 물었습니다. 저는 단순하게 “된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제도 된장을 밥과 함께 먹었지만 아무렴 좋았습니다. 그렇게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저와 아버지는 단둘이서 탁자에서 불편한 대화를 시작해 나갔습니다. 저는 금방이라도 과거의 트라우마에 울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진지한 대화를 할 때면 울음이 터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늘 술을 마신 채였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날, 아버지는 칼을 들고 저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그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늘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의 나쁜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했고 그만큼 많이 사랑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저는 아버지와의 진지한 대화를 할 때면 눈물이 터져 나오곤 했습니다. 사실은 저도 자신이 왜 그런 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니, 아버지께서 생각하기에 자신이 현실에 대한 사실을 말하게 되면 제가 지레 겁을 먹고 현실을 자각하고 혼자 이 험하고 험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기 바랐을 뿐이리라고 변명이라도 하는 것이 틀림없을 터였습니다.


아버지와의 그런 대화는 정말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사업 변경을 하느라 그동안 바쁘셨던 터라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감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 물론 그때도 흘러내리는 해수를 닦느라 휴지장을 낭비하느라 혼절을 할 정도로 온몸이 떨리고 안절부절못해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것은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까지만 해도 멈출 기미는 없어 보였습니다. 애써 참아 보려 없는 힘 있는 힘 다 써가면서 그런 무례하고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그 행동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저는 그저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는 한 반항기 십 대 소녀로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제가 느끼기에는 신세 한탄을 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운명이라서느니 하면서, 너는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그저 과도기를 겪고 있는, 게으르기만 한, 아무 능력도 없는,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회라는 걸 전혀 모르는, 요컨대 온실 속 화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자기변호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을 이어 나가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제 귓가에 그저 웅웅 대는 것 같았습니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말이었지만 제게는 아버지의 기나긴 말씀이 한마디로 하면 이렇게 들렸습니다.


'너는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어.'


저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였고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어떠한 말이라도 할 권리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저는 그 이상은 입으로 말할 힘이라곤 없었고 늘 아버지의 말씀에 가시를 돋게 하고 반대되는 말을, 부정적인 말을 해왔기에, 요컨대 저는 어떤 말을 하든 아버지께서는 어리석은 말, 철없는 말, 배부른 말이 되었기에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의자처럼 묵묵부답으로 시종일관할 생각이었지만 아예 대답하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인 분노를 볼 것만 같았기에 저는 되도록 말을 아꼈습니다.


어쨌든, 제 모든 말이 아버지께 그렇게 들리는 만큼, 저 자신도 아버지께 그렇게밖에 여겨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건 현재 진행형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우울이라는 것이 권력이나 어떤 약자로 절대 배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벼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아픈 사람, 상처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과도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 한 십 대 소녀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앞으로 가게 일에도, 제 의사와는 상관없다시피, 묵묵부답으로 시종일관할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간에 그렇게 될 터였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 간단한 일만 하면 된다고 하시는 아버지를 뒤로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에게는 흔한 일로 여겨집니다만, 저는 집안에서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곱게 자라났던 탓에 그런 일이 제게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 차가운 물에 익숙하지 않아 손톱 주변에 나 있던 자잘한 상처가 손이 퉁퉁 붓게 되니 하나둘씩 상처가 벌어져 터져버려 피가 흐르고 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날은 특히 추웠지만 쾌청해서 날이 잘 들어 환풍구가 돌아가는 그림자가 싱크대 위에 나란히 펼쳐져 그려져 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설거지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두 분이 제 상태에 대해서 알게 되신 줄 알고, 다투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기에 속으로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생각만 반복하며 눈물이 말라 가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설거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두 분은 마치 야생에서의 본능에 사로잡힌 동물처럼 분노라는 감정으로 심하게 다투고 계셨습니다만 저는 그런 거 이제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마치 세상을 잃은, 생기를 잃어버린 눈빛을 하는 자신을 의식하고 계속해서 하는 일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두 분 다 언성이 높아지시고 특히 아버지는 입에 차마 담지도 못할 욕과 협박 아닌 협박을 하시며, 마치 몇 년 전의 일이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찰나, 어머니께서는 설거지하는 저를 싱크대로부터 억지로 때어놓으시고 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빼앗아 던져버리시곤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경계하는 눈빛이 된 자신을 자각하고 다시 생기 잃은 눈을 한 모습을 한 자신을 이내 자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걸쳐 놓은 코트를 입고 짐을 챙기고 도망치듯이 가게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저는 실성하며 길거리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누군가와의 연을 제멋대로 끊게 하고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자신이 당하다니 웃기지도 않지.’라며 이렇게 된 것을 전부 제 잘못인 것인 양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실성하며 걸어가 도착한 곳은 집이었고 저는 방 안에 들어가 책가방에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좋아하는 것을 넣고 무작정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시내에 가 교보문고로 가서 인간 실격의 영문판 번역본을 손에 넣고 지하철을 타고 깜깜해진 저녁 즈음에 아양교역에 와서 근처 어느 한 카페에서 지금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카페에 도착해 대충 마실 것을 시키고 작은 테이블에 있는 자리에 앉아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다른 그 누구의 연락을 다 무시한 채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힘도, 그럴 용기도 없거니와 그 어떠한 대화도, 안부 인사도, 작별 인사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해 하소연하는 것 또한 전부 할 힘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타자기와 가상의 종잇장에서만큼은 잘만 씁니다. 아, 그나저나 이 카페의 주인은 늦둥이 딸이 있어 보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때 어떤 여자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직감적으로 이 카페의 여주인을 향한 소리라는 것을 눈치채고 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갔습니다. 고개를 돌려 본 광경에 저는 또 울음이 터져 나와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마구 애교를 부려 식구들에게 귀여움을 사던 제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향수(鄕愁)를 잘 느끼는 성격인 제게 이런 건 저를 더욱 인생, 이 반생과 빌어먹을 운명인지 우연인지 모를 그 무엇이든 간에 퍽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내일이 보란 듯이 올 것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멍하니 의미 없는 짓을 할 테고 부모님과 친구들, 선생님들 등, 주변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또 애틋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폐를 끼치고 신뢰를 끊어지게 하여 점점 제 곁을 떠날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정말로 혼자가 될 터였습니다. 차라리, 정신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었다면야 하얀 병실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고 하길 반복하는 일상을 갈망할 정도로 제가 만들어낸 이 지옥 같은 상황이, 이 지옥 같은 삶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돌아갈 곳마저 잃어버렸습니다. 돌아간다고 한들 반기 거나 제게 그리 좋은 대접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었습니다. 그저 철없는 불효녀로, 구제 불능의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있을 터였습니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꽃길이 아닌 지옥 길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고 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제 어리석은 행위가 철없고 짧은 생각의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저는 계속해서 이 세상을 증오하고 적개심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습니다. 요컨대 제 잘못에 대한 벌로, 이 하염없이 산봉우리처럼 높게 쌓여버린 이 업보에 맞는 대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성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저 이렇게 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무런 저항이나 노력도 해보지 않은 채 이렇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소중한 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또한, 저 자신까지 망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이대로는 이 세상에게 그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길 바라고 세상에 관한 그 어떠한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포기하려고 말 것입니다. 죽고 싶지만 살고 싶습니다. 제 모든 잘못들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제 죽음 하나로 모든 것이 온전히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으리라는 걸 어리석은 사람도 압니다. 이제 돌아갈 곳이라든가 자신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반겨줄 이 또한 없을 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남남이 되어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뼈저리게 후회한다든가 반성하는 것조차도 이제 그 감상이 도무지 느껴지질 않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아니, 모르겠지만 수없이 많은 반성과 자신에게 채찍질을 그 누구보다도 엄격하게 해 왔습니다. 저는 이제 인간으로서 살아갈 가치 따위는 없습니다. 저는 이제 인간의 자격조차 상실했습니다. 저는 살아갈 가치도, 이 세상에 대한, 저 자신에 대한 그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저는 죽어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잊어버릴 때까지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모든 이들에게서 말입니다. 저는 이제 빛과 희망도 없습니다. 모든 신뢰를 상실했고 인간으로서의 기대도 상실했습니다. 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 실격이었습니다. 아아, 저는 정말로 인간 실격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고야 말았습니다.


*


버스가 끊기고 지하철도 끊기면 택시를 잡아야만 합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버틸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다리와 무릎이 비웃으면서 떨고 있지만 저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자해한 양팔이 희미하게 쓰라리고 저릴 뿐입니다.


*


내가 정말로 주변이들을 바보 취급한 거구나.

아아, 내가 정말로 어리석어서

나는 본디 어리석었구나.


이게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시간쯤 되면 분명 나는 학교 보충을 마치고 돌아와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을 먹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신시에 학원에 갈 때까지

의미 없이 휴대 전화기를 열었다 닫았다

주야장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것이었겠지


또 의미 없는, 난데없는 눈물을 낭비하고

그 순간의 소중함을 당연히 여기며

잊은 자 자신을 의식하고 혼탁에 빠지게 되겠지


아아, 전전긍긍


그것이 어떻게 됐든, 나는 고작 그런 사람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었던가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것 같다


정말 어떻게 되어도,

죽는 건 싫지만


아직도 나는 삶에 어떤 기대를 품고 빛을 바라는 걸까

그런 걸까


아아, 나는 또 이렇게 바로 약한 소리를 내뱉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구나


아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분명 다 내 탓이로다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건


그래, 이건

내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


그래, 그 누구도 아무 잘못은 없어

나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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