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같은 건 없어. 헤픈 우연만 있을 뿐.
나는 더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너무나도 참혹해서 울부짖고 싶었다. 이별의 순간이 온 걸까. 아니면 이건 단순히 하나의 고비인 걸까. 네가 10월에 그랬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너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려고 하는 걸까. 이건 너의 인과응보일까, 자업자득인 걸까. 그게 그거지, 매한가지려나.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은 끝이 보일까. 한숨만 나오는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도 느꼈겠지. 내가 더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너무 지쳐버린 탓일까. 지쳐버린 내가 안 됐던 걸까. 봄의 적막함 같은, 마치 쓰다가 만, 주인을 잃어버린 책가방이 된 것 같은 쓸쓸함. 분분한 낙화를 즈려밟고 가는 봄날의 쓸쓸한 거리 같은. 사랑은 이래서 늘 어렵다. 특히나 남녀 간의 사랑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기에. 단지, 충분하지 않았던 것뿐인데.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또 나 자신을 속인다. 욕심을 부리는 걸 멈춰야 할 텐데. 연락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안 좋은 것을. 하지만 우리가 이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운명 같은 건 없어. 헤픈 우연만 있을 뿐. 이별이 뭐 그리 아름다울까. 뭐가 그리 아름다워서 나는 이리 쫓고 쫓기는 걸까. 내 솔직한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그와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정답인지, 그와 끝을 내는 게 정답인지. 이 글을 옮기고 있는 와중에는 이어나가겠다고 결심했지만 본래 글을 쓸 때에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때의 나는 왠지 끝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일이 되고, 모레가 되면 또 미친듯이 보고 싶어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락을 개마냥 기다려야 될 것 같았고,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이건 연민과 미련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연애는 마냥 기쁜 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관계에 대해서 숙고해보는 시간이 언젠가는 찾아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답은 오직 스스로가 내려야 할 것이다. 다시 구원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하고 만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지만 이제 그만 자야 할 시간이야.
아아, 차라리 병에 걸려 확 뒤져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걸 내려 놓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 미련하고 한심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역설적인 생각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일지도 모르겠다.
우울함과 힘듦이 공존할 때마다 자신이 큰 병에 걸려 단명하길 몇 번이고 기도했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책임감 없는 우리들의 행위인지.
머리가 아팠다.
사랑하지 않아, 너 따위는. 없는 것보다 더 나은 건 없을 테니까.
자고 싶지만 이런 마음으로 잘 수는 없었어. 나는 오늘 하루를 반성하면서 자기로 했으니까.
사고, 생각, 사색, 숙고, 고려. 이제는 평범하게 나열할 수 있게 된 걸 보니 나는 멀쩡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