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집은 부산 어느 언저리 2층집 단칸방입니다.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자고 일곱 가정이 건물 밖 공동화장실을 썼던, 80년대 초반에 흔했던 집입니다. 연탄 아궁이가 방에 있어 세 살 어느 날 죽솥에 팔을 뎄다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왼쪽 팔꿈치 아래 흐린 흔적으로 남은 그곳을 위해 젊은 부모님께선 얼마나 마음쓰셨을까요.
아홉 살 3월 25일에 방이 두 칸 있는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마당 넓고 주인 할머니까지 다섯 집이 사는 월셋집이었습니다. 학교 갔다 와서 새 집에 가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500원짜리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라면이 100원 하던 시절 완두콩이 듬뿍 들어간 짜장면은 입학식,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제가 안방을 쓰고 오빠와 남동생이 작은방을 썼습니다.
열한 살 어느 날 옆방 살던 분들이 이사 가시면서 방이 하나 비었습니다. 그 방을 오빠와 동생이 쓰고 작은방을 제가 쓰게 되었습니다. 혼자만의 방, 창이 동쪽으로 난 공부방이 얼마나 기쁘던지요. 신형원의 <작은 창> 닮은 방에서 스물일곱 살 2월까지 책 읽고 공부하고 일기와 여러 글을 썼습니다. 먼 곳에 발령받아 자취할 때, 결혼하고 아이들 키울 때 그 방이 종종 그리웠습니다.
밖에서 이 닦고 세수하는 집, 재래식 화장실 쓰는 집이었지만 불편한 줄 몰랐습니다. 높은 곳에 있어 용두산공원까지 두루두루 보였고, 너른 마당에는 주인 할머니께서 가꾸신 봉숭아와 분꽃이 가득했습니다. 키 큰 무화과나무에 주렁주렁 무화과,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던 무궁화는 한 해 두 해 흘러도 늘 그대로였습니다. 밤이면 달빛이 그윽하게 찾아왔습니다. 아주 가끔 별도 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집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주인 할머니도 별이 되셨고, 부모님은 새 집을 알아보셨습니다. 막내가 태어나던 해 부모님은 31년 동안 정든 집을 떠나 다세대주택 꼭대기 층으로 옮기셨습니다. 겨울에 내려가니 방이 넓고 집 안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옛날 그 동네가 더 편하다 하십니다. 오랜 이웃들이 있고 마음 한켠에 진한 그리움으로 남은 그곳.
작년에 부모님이 한 번 더 이사하셨습니다. 생각지 못한 곳에 작은 집을 얻게 되어 여름부터 가을까지 바쁘셨습니다. 행정구역상 40년 사셨던 곳과 가깝고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그곳. 이사 준비하면서 동생이 찍어 보낸 사진 보며 '이제는 부모님이 조금 더 편하시겠다!' 집안 어른들도, 부모님 친구분들도 집 좋다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찾아뵈면서 저도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8년 전 장혼(張混 1759~1828)의 <평생지(平生志)>를 읽었습니다. 인생 후반 어렵게 얻은 집에 이이엄(而已广)이란 이름을 짓고 가난하지만 소박한 일상에 자족하던 사람. '이이(而已)'는 '~일 뿐이다' 또는 '~이면 그만이다', '엄(广)'은 '집'입니다. 한유(韓愈 768~824)의 시 "허물어진 집 몇 칸뿐[破屋數間而已矣]"에서 따온 말을 자신의 호와 서재, 집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비 오는 아침, 눈 내리는 낮, 저녁 풍경, 새벽 달빛은 그윽한 삶의 신비로운 운치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어렵다. 말해 준다 해도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스스로 즐기다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평생의 소망이다. 그뿐이면 된다." 새벽에 깨어 <평생지>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습니다. 부모님께서 새로운 집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