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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Nov 27. 2021

급식체로 논술하다

재작년 순회 학교 평가계획 짤 즈음 급식체 사전 소개글 읽고 '이거다!' 34과 훈민정음 서문과 급식체를 연계하면 재밌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책 읽으려니 뭐가 그리 바쁜지요. 한 학기가 후다닥 지나가고 2학기 34과도 슬슬 끝이 보입니다. 서둘러 책 읽으면서 2차 논술 연습지와 문제지를 만들었습니다.


고입 앞두고 한참 바쁠 아이들이라 가볍게 운을 뗐습니다.

"이번 논술은 급식체로 봅니다."

순간 '?!?' 하는 눈빛, 눈빛들.

"'인싸' '갑분싸'처럼 급식 먹는 중고등학생이 주로 쓰는 말을 급식체라고 하지요."

급식체 사전 책 보이면서 연습용 원고지 나눠 주니 그제야 뭐 아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험 당일. 연습용 원고지에 없던 훈민정음 서문 번역을 넣었습니다. 곳곳에서 한숨 푹푹. 그래도 답안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잘 썼습니다. (가)의 일부를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는 조건에 걸려 낮은 점수 받은 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 뜻밖의 아이들이 번득이는 글 써 "우와!" 열여섯 살 청춘들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달까요.

2019.11.12.(화)

점수 나오는 날 학생들 의견을 칠판에 썼습니다. 대체로 찬성 반 반대 반. 찬성하는 아이들은 청소년 문화다, 같은 말 쓰면 동질감을 느낀다, 급식체가 창의적이라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조 정신을 계승하는 면이 있다. 반대쪽에선 한글 파괴다, 급식체 안 쓰는 청소년이나 잘 모르는 어른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충' 같은 비하 발언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가장 수업태도 좋았던 4교시.

찬성이든 반대든 나름 소신 있게 잘 써 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어른들 앞에선 안 쓰기', '좋은 말 가려 쓰기'도 칠판에 옮겼습니다. 조금 엉뚱했지만 논술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더 깊고 넓게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눈 맑은 아이들이 세종대왕의 옛글과 애민정신을 지금 눈높이로 이해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멋진 0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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