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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 문학과 지성사

by 해나책장

그림자를 판 사나이 페터 슐레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원작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 페터 슐레밀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금을 무한히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와 바꾼다.

하지만 금을 만드는 자루는 행운이 아니었다.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어서 가는 곳마다 배척 당한다.


"그림자가 없다니 사람도 아니야."


우여곡절 끝에 그림자도 행운의 자루도 잃고 방황하던 슐레밀은

한 걸음에 칠십 리를 가는 전설의 장화를 얻게 된다.


"나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연을 연구하면서 살거야.

이제 개인적인 학자로서 살아갈거야."


그는 여러 권의 중요한 책을 쓰고

학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꾸려 나간다.

슐레밀은 자신의 마지막 원고가 레블린 대학에서 출판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그림자를 중요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


그림자가 없어 세상에서 환대받지 못한 슐레밀.

그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하는 방법을 찾는다.

얼굴없는 저자가 되어 책 속으로 사라진다.



인류학자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는 이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이 그림자는 우리의 정체성,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람다움'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람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진정한 환대는 조건부가 아니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현대 사회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이 책은 '사람 행세를 하고 사람 대접을 받는 데

물질적인 조건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p.26 고 말한다.


이 책은 7장으로 구성 된다.



1장. 사람의 개념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3장. 사람의 연기/ 수행
4장. 모욕의 의미
5장. 우정의 조건
6장. 절대적 환대
7장. 신성한 것



태아, 군인, 사형수, 노예, 장애인,

2등 시민 등, 소수자들을 향한 우리의 사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이야기의 끝에는 '우리가 절대적 환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마음이 기다리고 있다.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사회학, 철학, 역사, 정치 경제학 이론을 근거로

작가가 나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는 제목처럼 사람, 장소, 환대이다.

그리고 사람이 장소를 초월하여 환대를 받는 필수적인 요소인

'성원권'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며 가야한다.

성원권은 '사람됨'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면

성원권은 박탈 된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성원권을 훼손하는 다양한 사례들과

이를 근거하는 이론들을 소개한다.

개인은 남의 도움 없이 계속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사람 대접을 받음으로써

매번 사람다운 모습을 획득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재소자들이 받는 비인격적인 처벌이 재소자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

다리를 못쓰는 남자가 식당의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

달려온 종업원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편안한 식사를 위해 나가 달라" 요청하는 것,

손님으로 갔을 때 환대받던 외국인이

이민자가 되었을 땐 몇 십년이 지나도 그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

우정이란 동등한 균형 안에서만 유지 된다는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미처 인지 하지 못한 미묘한 차별이 깃들고

그가 받을 고유의 성원권은 훼손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제 안에도 미묘하게 자리잡고 있던 차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사람 대접을 받을 때'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절대적 환대를 향하여




6장과 7장은 우리가 나아가야할 절대적 환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한다.

환대란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

그리고 사회 안의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에선 절대적 환대의 방향을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로 표현된다.


모든 인간 생명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되고,

공적 공간에서 모든 사람은 의례적으로 평등하며,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것.




우리는 자신의 거처에서

온전히 주인이 된다





이 책의 제목이 사람, 장소, 환대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장소"다.

이 장소는 우리가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누군가가 점유할 수 있는 위치를 가리키기도 한다.

장소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이 깃든다.


이 책은 말한다.



"현실의 인간은 그처럼 가볍게 삶의 근거지를 바꿀 수 없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억의 무거운 짐을 끌고 다녀야 하는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갈 때마다 이 짐은 점점 불어나기 때문이다.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소'의 의미에 천착하는 것은 이 모든 이유들에서이다. p.298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며,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곧 이 장소에 대해 권리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손님이자 주인으로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환대받지 못했던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책을 마친다.





"그림자를 중요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했던 그림자를 판 사나이 슐레빌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환대를 받는 것 속에서

사람의 성원권은 단단하게 보존된다.

사람의 환대에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유능하기 때문에,

마음이 선하고 배려가 많아서,

장애가 없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니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이기에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받는 것.

이 책을 천천히 읽어온 시간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원권에 대한 존중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기회였다.


우리가 가만히 진지하게 들여다 봐야 할 세상에

존중받는 사람과 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와

다정한 환대가 깊이 스며들길.





https://www.youtube.com/watch?v=HP6_1yU2P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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