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기억하고, 말한다. 피해학생 편에 서서 진실을 밝히다 죽은 한 수녀, 학창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스승을.
나는 사립학교 출신이다. 그것도 외국 선교사가 세운 감리교계 미션스쿨. 같이 공부했던 아이들은 선하고 생동감 있었고 좋은 추억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앞에서 교장 편과 교감 편이 싸웠고. 부당한 폭력과 강요 성희롱도 만연했다 학교 내 정치로 인해 똑똑하고 열정적이었던 여자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뒀다. 무엇보다 우리를 가르쳤던 참 말도 많았던 모 남교사가 성추행으로 고발돼 결국 학교에서 면직이 됐다. 사실 그 남교사뿐 아니었다. 이상하고 변태적인 선생들이 참 많았는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때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이게 한국만의 독특한 권위주의의 산물이며, 그 영향력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 다큐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대부분의 십 대 여자아이들은 겪는 일 이건 세계 어느 나라나 상관이 없구나. 혹은 더 끔찍할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다큐멘터리를 즐겨봤던 나는 조금 커서는 영화잡지나 사이트에서 다큐멘터리 관련 카테고리를 유심히 보았다가 영화관에 가서 직접 관람해왔다. 지금도 인상에 강하게 남는 작품은 <코브>, <경계도시 2>, <슬기로운 해법>, <쿼바디스>, <논픽션 다이어리>등이 있다. 이 코로나 사태가 끝나서 괜찮은 다큐멘터리가 영화관 개봉을 한다면 언제든 다시 가서 볼 용의가 있다.
이후 OTT 서비스가 나온 뒤엔 넷플릭스든 다른 서비스이든 다큐부터 즐겨보곤 했는데
이런 경험을 가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캐시 세스닉 수녀 살해사건(미제)>를 담은 이야기였다.
다큐아리움에서 처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2017년 제작되어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다큐멘터리 '천사들의 증언'. 원제목은 The Keepers다.
이 작품은 1969년 볼티모어의 가톨릭계 키어 여자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미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학생들을 사랑했던 젊은 선생님 캐시 세즈닉. 그녀는 학교 교목신부인 조셉 매스켈에게 성폭행당한 제자를 도우려다 의문사당한다.(사진 출처 : 넷플릭스 캡처)
살해 피해자는 케시 세스닉 수녀. 이십 대 초반, 키어 대주교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교사였다. 퇴근 후 차를 몰고 약혼을 앞둔 여동생 선물과 빵을 사러 나갔다가 실종된 뒤 2개월 만에 눈밭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녀의 죽음은 처음엔 주위에 여자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살해했던 연쇄살해범의 소행인 듯 보였지만. 다큐멘터리가 진행될수록. 무언가 안 좋은 일. 그것을 폭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살해로 윤곽이 잡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고 파헤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녀의 제자들. 이제 60이 다 된 할머니들이 끈기와 열정을 갖고 취재를 하고 내용을 정리하고 SNS로 이 미제사건을 공론화 하기 시작한다.
이제 60줄에 접어든 캐시 세즈닉의 제자 애비 쇼브와 제마 호스킨스, 45년이 지난 스승의 의문사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 : 넷플릭스 캡처)
그녀들이 모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나중엔 실제로 캐시 세스닉 수녀의 시체를 봤던 무명의 피해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법정에 서기까지 한다. 작은 틈에서 터져 나온 진실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크게 휘몰아친다.
볼티모어는 가톨릭이 세력을 잡은 지역이고, 마을 전체가 가톨릭 종교 공동체나 다름이 없다. 어린 시절 그 지역에 사는 가족과 아이들은 성당에 가서 영세를 받고 일요일엔 꼭 성당에 갔다. 생활의 모든 부분이 가톨릭과 연관이 되어 있었고. 이 다큐멘터리의 무대인 키어 대주교 고등학교는 이 지역의 가톨릭 명문 여자 고등학교로. 좋은 시설과 교육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했다.
이 지역의 척추와 같은 가톨릭 신앙.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종교지도자 즉 신부들이었다. 만약 그 신부들이 위의 캐시 세스닉 처럼 선하고 양심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 훌륭한 고등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복잡하게 얽힌 그루밍 성폭력. 그루밍 성폭력이라기엔 이 다큐에서 묘사하는 범인의 행동은 협박의 수준이다. 끔찍함을 넘어선 잔인함을 보여주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학교에 입학한 여자아이들은 명석하긴 했지만, 주로 노동자 계급 그리고 다자녀 형제 가운데서 치여 자라온 터라 부모의 돌봄과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슬프게도 이 중에는 집안에서 성적학대를 받아온 아이도 더러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가톨릭 문화 특성상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혹은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며, 고해소에 들어가고 그 뒤로 아이들은 본격적으로 성학대의 늪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성폭력의 주범은 다름 아닌 이 학교 권력의 정점, 교목신부인 조셉 매스켈이었다.
2001년 지병으로 숨진 조셉 매스켈은 존스 대학에서 상담학을 전공한 바 있다. 그는 이 상담학을 무기로 제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사진 출처 : 넷플릭스)
닐 매그너스와 조셉 매스켈은 서로 한 자리에서 혹은 따로따로 집안에서 학대를 받았다는 아이를 정화시켜준다는 목적으로 협박을 통한 성폭력을 자행하고 때로는 학생을 경찰에게 성적으로 팔아넘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집안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조셉 매스켈 신부가 '너희 부모가 알면 너를 창녀로 알 것이다'등등으로 협박하며 그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쥐고 있는 것을 똑똑하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누군가 피해를 말하며 오히려 그 피해 학생이 소위 '꽃뱀'으로 몰릴 터였다.
조셉 매스켈은 단지 종교적인 권력만 누린 게 아니었다. 그의 친 형제가 존경받는 지역 경찰이었고 그는 경찰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에도 말할 수도 피할 수도 없이 꼼짝없이 당했고. 그 아이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잔인했다고 생각하는데, 집안이 어렵고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여자애들만 골라서 피해를 입혔다는 거다. 한마디로 괴롭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아이들 말이다.
그러나, 젊은 선생님 혹은 수녀였던 캐시 세스닉이 제자들의 피해를 눈치채기 시작한다.
한 아이가 세스닉 수녀에게 상담을 요청해 왔고, 세스닉 수녀가 듣기 시작한다. 점차 그 아이들이 늘어간다. 또한 조셉 메스캘이 아이들을 호출하려 했을 때 이미 방과 후라 집에 갔다고 아이를 숨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여동생의 약혼선물을 사러 갔다가 실종된 캐시 세스닉 수녀는 2개월 뒤 숲 속에서 두개골이 함몰되고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 사건은 지역경찰과 종교계의 암묵적인 거래 속에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진실은 45년이 지나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위에서도 말했듯 처음 수사를 시작했던 르포 작가와 두 명의 제자 덕이기도 하지만. 캐시 세스닉에게 피해사실을 밝히고 상담을 했던. 무명의 소녀가 나이가 들어 자기의 실명을 밝히고 나타난 것이다.
진 헤거돈 이라는 피해자. 심지어 그 피해자는 캐시 세스닉의 시체를 조셉 매스켈이 자기에게 보여줬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수녀의 죽음이 가해자를 방어하기 위해 행해진 살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사람 말고도 조셉 매스켈과 매그너스 그 외 경찰들에게 성적학대를 받은 피해자들이 많이 나왔고, 1990년대에 법정에서 증언까지 했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되어 버리고 7부 마지막까지도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을 보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2001년 조셉 매스켈은 법의 심판을 받기 전에 지병으로 사망한다.
나중에 더 밝혀지지만 조셉 매스켈은 여자아이들만 성폭행한 게 아니었다. 남자아이들도 성추행했고 그 죄가 드러났지만 그때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게 추문이 되어 교세 확장 혹은 명망에 해를 끼칠까 봐 대충 덮고 그를 다른 데로 또 다른 데로 옮기고 새롭게 시작을 하게 했다. 결국 조셉 매스켈은 그런 안일한 대처를 등에 업고 더 기세 등등해져서 키어 대주교 고등학교에 와서 더 진화된 범죄행각을 벌였고. 결국 선하고 의로운 젊은 수녀를 살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인맥과 권력을 통해 무마시키기 까지 한 것이다.
이 7부작 다큐멘터리의 끝까지 보면서 답답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완전히 해결이 난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답답함의 반대편에, 아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신들을 위해, 용기를 냈던 캐시 세스닉 수녀를 그리워하는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다.
말을 들어주고 결국엔 용기를 내어 제자들을 보호하려했던 스승 캐시 세즈닉, 제자들의 기억 속엔 수 십년이 지났어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사진 출처 : 넷플릭스 캡쳐)
이들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스승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노년에 까지 기억이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 어떤 행동을 촉발하는 선생님은 드물다고 본다.
좋은 스승은 많지만 진실을 위해서 용기를 내는 스승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아주 어린 스물몇 살의 나이 가족과 수녀 동기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귀한 사람이 끔찍한 죽음으로 생을 마쳤을 때, 시간이 수십수백 년이 흘러도 잊히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닫힌 사회가 가진 위험성,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정돈된 곳에서 행해지는 폭력.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약자 편에 서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이 모든 것을 무마시키는 거대한 구조적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