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독서의 기록 6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에서는 몇몇 친독 성향의 협회와 조직들이 활동했다.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링크(Link)'라고 불리는 단체였다. 그 단체는 주로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모든 국보가 파괴되기 전에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하는 것이 국가에 가장 이익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침략을 도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맥스웰 나이트는 실제로 미스 코플스톤이라는 이름으로 돌핀 스퀘어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MI5 비밀 지부를 관리했다. 조앤 밀러는 실제 그의 비서였고, 뛰어난 스파이였다. 그리고 맥스웰 나이트는 실제로 사무실에서 동물을 길렀다.
블레츨리 파크는 내가 묘사한 그대로였다. 오늘날 그곳을 방문해 그토록 대단한 작업이 이루어지던 공간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리스 보엔, 역사적 사실 <팔리 들판에서>
2차 세계대전 중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가상의 영지인 '팔리 플레이스'에서 자리 잡고 사는 로더릭 서턴 백작 가족과 그의 아내 에스메 그리고 그의 다섯 딸들 이야기 중심으로 흘러간다.
특히 이 다섯 딸들 중 진 주인공은 패멀라, '패머' 서턴이고, 그와 이웃한 지역에 사는 글레스웰 목사(아마 영국 국교회, 성공회 신부인듯하다. 성공회 신부는 결혼 가능, 자녀도 가질 수 있음. 편의에 따라 목사라고 번역된 듯)와 그의 아들 벤 글레스웰이 남주 롤을 맡고 있다. 그 외에 금융업자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네더코트의 프레스콧 경 가족의 금지옥엽 아들 제러미 프레스콧이 '엄친아'롤을 맡고 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귀족가의 평화로운 일상을 그리고 있진 않다. 팔리 플레이스 저택은 전시임을 감안. 집 절반을 군인에게 내어주고 있으며, 패머 서턴은 암호해독과 그 외 정보 업무로 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블레츨리 파크'에서 근무 중이다. 그리고 그 '엄친아' 제러미는 그 당신 엄친아 답게 옥스퍼드를 나와 비행기를 몰고 다니고 말이다. 심지어 이 친구는 2차 세계대전 독일과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혀있는 실정이다. 나름 여기까지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쥬고, 독일은 무시무시한 괴뢰고 영국인들은 걔네 때문에 그나마 <그 유명한 음식>의 질이 더더욱 떨어져. 그 대단한 귀족들도 음식을 아껴먹고, 런던에 사는 패머와 벤은 그야말로 종이를 불린 것 같은 포리지와 톱밥으로 만든 것 같은 소시지를 먹고 버티며 산다. 영국인이 영국 음식 욕하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깨알 같다.
스토리를 쭉 읽다 보면 이거 또 전쟁 연애담인가 싶기도 하다.
이웃 친구로 꼭 삼각관계 삼총사처럼 지내온 '엄친아' 제러미, 가난한 성공회 신부의 아들로 고학을 해서 '옥스퍼드'를 졸업한 벤, 그리고 예쁘고 똑똑하고 정의로운 그것도 셋째딸! 패멀라 서턴. 그 외 철이 없는 넷째딸 파리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며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둘째딸 혹은 천둥벌거숭이이지만 머리가 겁나게 좋은 막내딸과 그저 그런 현모양처인 첫째딸... 이걸 보니 작은 아씨들이나 오만과 편견 뭐 그런 느낌이 좀 들긴 하는데 또 그것도 아니다. 뭐라고 할 건 없다.
뭐 포화속에서도 사람은 누군가를 임신시키고 애도 낳고 뭐 치정도 살해도 하고 그러니.
그러나 이 '리스 보엔'이라는 작가는 다른 면을 주목한다. 이것도 '그들만의 리그'라는 거다.
이 소설은 팔리 들판에 추락한 낙하산병의 시체가 발견된 이후 당시 MI5에 근무했던 벤이 조사를 맡으며 본격적인 전쟁 첩보 이야기로 방향을 틀지만, 그전에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잘생기고 부자이며 신체 건강한 귀족 아이 '제러미'는 예쁜 연상녀 패머 앞에서 그 비행 자랑하려고 친구이자 항상 숨어 좌절했던 연적인 '벤'을 자기의 비행기에 굳이 태운다. 그러나 운전을 개같이 해서 벤의 한쪽 다리를 박살 내 놓는다. 그러나 지는 멀쩡했다. 결국 제러미는 당당하게 2차대전의 참전용사로 비행기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지만 벤은 그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일상생활정도 간단하게 할 수 있도록 다리에 철심을 박고 살아야 했다. 당시 군복을 입을 기회조차 없는 그가 길을 다니다가 참전용사의 부모나 꼰대들로부터 한 소리 들을 때마다 그 다리를 보여주면서 아닥 시키고. 벤이 스스로 씁쓸해 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러미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고, 벤은 지인의 소개로 MI5에서 일하게 되고 거기서 또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해독을 돕는 일을 하는 패멀라와 만날 기회를 얻었다는 것.
사실 전쟁은 귀족이나 지도자급이 내리는 결정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벤이나 현대의 나와 같은 일반인이 한 나라의 군대를 여기로 보내야 한다고 맘을 먹어도 그게 실제로 일어날 일 없고 다른 나라 정상과 외교를 하거나 혹은 세작질을 주동할 수 도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쥬'도 일단 형편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거다. 20세기 초반에 애초에 비행기를 가지고 있고, 그 고급 기술을 배울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형편이 되어야 그 대단한 명예까지 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 가운데에 들러리처럼 희생된 서민들이 있고.
문란하고 자신감 넘치는 귀족 엄친아와 그 귀족 엄친아 보다야 인성으로 보나 두뇌로 보나 훨씬 뛰어난 엄친딸 패머. 그러나 패머는 여자로 태어난 탓에 비행기도 못몰고 그저 '블레츨리 파크'에서 끔찍한 음식을 먹으며 암호해독 보조나 해야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눈이 예쁘지만 집안이 한미하고 망할 엄친아 덕에 장애를 얻은 조신한 남자 벤. 그들이 펼치는 로맨스 활극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사건 하나하나 배경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의미가 크다. 사실 리스 보엔이 하고 싶은 말이 이게 아닐까 싶다.
전쟁은 너네 귀족이 일으키고,
너네끼리 서로 싸우고 폼 잡는 사이
죽어가고 다치는 건 결국 수많은 보통사람들이다.
그리고 너희가 만든 개판을
힘들여 해결하는 것도 보통사람들이고!
양심이 있다면 약간의 책임이라도 지렴
다행히도 제러미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 어깨에 총은 좀 맞았지만 장애는 얻지 못한 상태로 돌아와 패머에게 플러팅을 가장한 성추행을 해대고, 당시 시대가 시대였는지라 그걸 오로지 플러팅으로 이해한 패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장면 보고 제러미놈의 힘줄 다 끊어놓고 손목뼈를 가루로 만들고 싶었음)그래도 패머는 집안 교육이 잘 되었는지 그 와중에도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이나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사람들을 생각하며 제 할 일을 하려 한다.
벤이 제일 짠한데, 그 플러팅하는걸 지켜보며 시무룩해져가지고는 여러모로 씁쓸한 하루를 맡겨진 일을 해나가며 견뎌나간다. MI5의 열악한 환경에서 버텨오던 벤. 하필 그가 자라왔던 그 팔리 들판에서 발견된 시체가 영국군이 아니고 영국군으로 가장한 독일군 스파이임을 알아챈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연고가 있으니까 니가 가서 조사해 봐라>라는 명령에 따라 고향에 돌아온다. 그는 자기가 MI5라는걸 숨긴 채 여기저기를 캐고 다니며 의무를 수행한다. 특히 그 시체의 품에서 나온 사진과 빛에 비추니 나타났던 1461이라는 숫자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계속 밝혀 나가는 장면이 꽤 재미있었다.
1461년은 수 년에 걸쳐 진행된 장미전쟁 중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6세가 물러나고 요크의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등극한 사건이 있었던 연도다. 결국 엎치락뒤치락 끝에 수많은 귀족들이 죽어나가고 랭카스터가의 모계와 한 줄 정도 연결되어 있던 헨리 튜더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고 말이다.
결국 이 1461이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스파이 추리물을 이끄는 열쇠가 되어 이야기를 흥미로운 쪽으로 몰고 간다. 중간에 둘째 딸 마고가 프랑스에서 겪는 일 '코코 샤넬'을 모델로 만든 '지지 아르망드'와의 얽힘과 독일 장교에게 끌려가 겪는 일들이 그려진다. 마고는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프랑스 연인의 희생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게 되고 말이다.
리스 보엔은 이 소설에서 나오는 친독일 귀족 모임 '링'의 모델이 실제 있었던 '링크'를 본따 만든 거라고 밝혔다. 전쟁 중이 아니어도 실제로 적국과 내통하는 지도층들이 있다. 그들은 매우 사악하든지 아니면 온실 속에 자라서 그런지 매우 나이브하다. 일단 이 나라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더라도 자기의 기득권만 지켜지면 별 상관이 없다는 거. 겉으로야 문화재를 말하지만 그들이 지키고 싶은 게 문화재겠는가?
리스 보엔이 말하고자 한 메시지가 재미있게 펼쳐진 부분은 '제레미 귀환 기념 파티'였다. 당시 꽤 명망 있는 서턴 백작도 마음껏 쓰지 못했던 주유권을 펑펑 쓰며 롤스로이스를 몰고 다니는 프레스콧 경과 그 망할 놈의 영국 음식과는 한참 다른 엄청난 음식들을 펑펑 만들어서 대접하는 모양.
그들이 그런 사치를 부릴 때, 그나마 어떻게든 노예는 안되어보겠다고 배운 것을 짜내어 고생을 자처하며 첩보전이며 전쟁 한복판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고, 팔리 들판에 피난 온 유태인 예술가과 의료인은 낯선 곳에서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와서 헛짓이나 하고 결국 패머의 친 동생과 친구까지 건드리는 그 대단한 제러미의 '남창'짓이 가관이었다. 패머에게 마음이 있었던 벤, 그걸 알고 속상해도 꾹꾹 참고 제 할 일 하는 그 가난한 성공회 신부의 아들과 비교되는 부분이었다. 결국 그 제러미의 '남창'짓은 패머에게만 했던 짓이 아니라는 게 마지막에서 드러난다. 복선이라고 봐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이야기는 술술 풀린다. 그동안은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고 있어 서로의 일에 대해 꾹꾹 숨겼던 패머와 벤. 어느날 그 두 사람은 런던의 보안부서에서 극적으로 만나 서로의 부서와 하는 일을 제대로 확인한다. 그 시점부터 각자 가진 정보를 합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첩보추리물의 모양새를 띄고... 갖은 고생을 함께 한 끝에 결국 적의 암호를 풀고 내부의 배신자와 테러 계획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진다.
▼ 이 글의 출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02509240002232
이 소설 속에선 당시 조지 6세 대신 에드워드 8세를 다시 세우려는 '친독일세력'이 있단 이야기가 나온다. 이건 역사적 사실이다. 쭉 읽어나가며 당시 영국에 있었던 일들, 에드워드 8세의 양위와 조지 6세의 즉위가 영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책임감 없이 사치나 부리는 난봉꾼 망나니 왕자와 얼결에 맡은 어려운 자리를 어떻게든 해내고는 결국 병을 얻어 죽은 왕이 비교되는 부분 말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8세는 자기가 던져놓고는 히틀러랑 친구 먹고 또다시 인터셉트하려 했으니. 한심 그 자체였다. 리스 보엔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제레미 프레스콧과 일가들이 하는 짓들을 보니 에드워드 8세의 행적과 겹쳐지는 부분이 보였다.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부분은 우리나라와 일본, 영국과 독일은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
영국 왕실은 친가와 외가 모두 독일계 왕조였다. 적국이 되며 하노버에서 윈저 왕조로 개명한 것도 유명하고 말이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에게 자신의 성을 내어주고 돌봐줬던 빅토리아 여왕의 외증손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원래 성도 독일 성인 바텐베르그 였다.
우리는 생판 피 한 방울 안 섞인 왜놈이 들어와서 멀쩡한 황후를 살해하고 국권을 뺐었지만, 저 유럽은 하도 피가 섞이고 특히 독일과 영국은 접점이 많기에(예전엔 프랑스와도) 에드워드 8세나 귀족 가문이 친독일행보를 한 게 우리나라의 친일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맥락이 있는 것 같았다.
우아하고 고전적인 터치로 만들어진 전쟁 첩보물은 오랜만에 본다. 특히, 책 한 권에 담긴 역사적 맥락이 꽤 다양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