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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Feb 27. 2023

Peter Skellern "Rest In Peace"

10곡의 노래와 10개의 이야기


故 임보라 목사(1968~2023)님과 나의 할머니들을 기억하며

https://www.youtube.com/watch?v=EipEvYOJV70

1947년에 태어나 2017년까지 이 세상에 귀한 곡을 남기고 천국에 간 음악인 피터 스켈런 선생님.난 이 분의 명곡인 'Rest in Peace'가 추모의 진정성을 그대로 담았다고 생각한다.
귀한 사람이 천국에 갈때 꼭 이 곡이 생각나더라. 모든 아프고 약하고 밀려난 자들의 벗. 임보라 목사님.
지금은 다른 곳에 계시지만 언젠가 만날 임보라 목사님에게 들려드리고 싶었다.


유신론자다. 외, 친할머니로 부터 내려온 유산이 있었거든. 남들 다 지내는 제사나 차례를 본 일이 없어서. 어릴 때부터 명절을 좀 다르게 보냈다. 뭐 대충 구석에서 전 부치고 작은상에서 밥먹고 그런 여자들과 쳐 누워 있다가 절이나 하고 쁘띠 제사장 노릇하는 남자들을 안보고 지냈다는 거. 이건 할아버지들이 부모님이 결혼하시기 전 돌아가셔서 가능했다 본다. 외가는 좀 다정하게 친가는 심드렁하게 응 너네 어떻게든 잘 살렴이란 태도였기 때문에 다들 그런줄 알고 살았다. 유교나 무속적인 금기가 전혀 없는 집에서는 웬만한 잔소린 다 개나 줘라다. 그런걸로 후손들 협박할 속좁은 양반들이 아니란 믿음이 있다.

더 귀한 자식도 덜 귀한 자식도 없었다. 집에 '제사장'노릇할 사람 자체가 필요없으면 참 많은 게 달라진다. 무엇보다 그분들은 살아계실 때 자식(며느리 포함)이든 누구든 내 밥차려라. 너는 남의 집 딸이니 우리 집 자식 대접해라 혹은 나를 대접해줘라며 징징거리는 유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잘못할 때 엄마에게 사과하며 아빠를 크게 혼낸 친할머니. 같이 사는 큰 외숙모가 스트레스 받을까봐 만삭인 엄마가 친정에 찾아가 외할머닐 만나고 싶어했을때 집보단 바깥에서 만났던 외할머니. 그런 식의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분들은 몸이 아픈 순간에도 못 해줘서 아쉬워 하고 폐끼칠까봐 미얀해하고 조용히 지내셨다.

그러니 혹시라도 갑자기 나타나 묫자리 밥상타령하면 절대로 그 분들이 아니란걸 안다. 그저 거렁뱅이짓 하는 흉내쟁이 악귀니까 꺼져라 하면 그만. 어차피 그분들 다 천국에 계신데 뭘.


연휴는 그저 휴일이었고, 아무 날 아무 데나 그냥 실용적으로 이사하고, 아무거나 막 먹고 아무 때나 돌아다니고 뭐 그러고 살았다. 그리고 집 구석구석에 책과 성서, 신앙서적이 가득했다. 한 없이 너그럽고 다정했던 외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불렀다. 뭐, 나도 활동적이지도 않고 놀거리도 별로 없었으니 집에 있었던 여러 책을 읽었고, 어릴 때부터 공동번역 성서를 이야기 책 읽듯이 읽었다. 외가와 친가는 개신교 큰 아버지네는 가톨릭, 나에게 이모 역할을 해준 엄마의 절친도 가톨릭 그리고 나도 가톨릭 친구들이 많았고.

이런 이유로 집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문화가 조화롭게 뒤섞였다. 수녀원과 수도원, 가톨릭 행사도 엄마따라 가본 일도 많고... 어차피 공동번역 성서가 문익환 목사님을 포함, 구교 신교가 힘을 합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글로 번역한 버전이라. 어린 아이가 읽기 쉬운 말로 되어 있는 공동번역 성서의 통독이 가능했다. 그리고 일요일엔 동생들과 당연하게 교회에 갔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를 다닌다고 다 유신론자가 되는 게 아니더라. 오히려 질려서 더 멀어질 수도 있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부분이 있다.

교회 안에서 분명 어릴적에 읽고 사람들이 읊어대는 성경구절과 그 성경속에 있는 본질과는

너무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끔찍한 폭력과 배제 차별, 약자를 누르고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비틀어 사용하는 소위 '장로'들을 한 두명 본게 아니었다. 목사라고 다를까.

불행중 다행히도 어릴적 부터 다닌 교회의 담임, 원로 목사는 외도나 성매매, 폭행 추행 같은 성적인 비위나

돈장난에 연루되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칭송받기엔 그들은 반듯하거나 예쁘지 않은 사람들을 밀어냈고

설교시간에 감정적이며 무지성적인 기득권 옹호와 레드 콤플렉스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뭔가 답답했지만 대학가기전까진 잘 보이지 않다가. 머리가 조금 크니 숨어있던 파벌과 편가르기가 보였다. 그리고 일부 교회 어른들은 참 이기적이고 무례했고 어떤 사람은 지속적인 가정폭력과 외도, 사기, 탈세, 심지어 성매매 추행과 등등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교회 내의 질서를 위해 '약자'를 입막음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강요함으로 감춰졌다.

은혜롭게 말이다. 그들은 계속 그랬다.


성적소수자나 인권운동가를 타겟삼아 외부의 적을 만들어서 내부 결속을 다지는 거 말이다. 돈 많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비리폭로와  사회적 정의를 이야기하는 사람에겐 '교만하다'혹은 '의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건 좀 얌전한 편이고 '빨갱이'라고 욕을하고 장애인과 학생, 여성인권을 비롯 '인권'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인본주의자' 카테고리에 넣어 악마화했다.

어릴때 부터 다닌 모 교회. 청렴하기로 이름난 원로목사가 설교시간에 '이승만이 얼마나 훌륭한 장로 대통령이었는 줄 아냐. 이명박 찍어라'라고 한 그 순간. 어떤 또래 친구는 그 목사 보는 앞에서 나가버렸고, 나는 좀 더 버티다가 여러가지 일을 겪고 나왔다.

자칭 신자라 하는 사람들, 사실은 신보다 돈을 좋아하고 집값에 돌아버린 그들이 불러온 지옥, 겨우 좀 괜찮아 졌다싶으면 다시 불러오는 '악한 대통령'들과 '사학재단', '정치인'그리고 전쟁 PTSD와 생존공포에 질려있는 노인과 그 계층을 자극해서 돈을 뜯어내는 '정치목사'에게 질려있었다.


그때 난 차라리 한국교회가 망하고 종교개혁 ver.2.0이
일어나 다시 시작하길 원했다.

내가 성경에서 만난 신이 그랬으니까.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나라 마다 대표 신이 있었고, 나라의 패망은 곧 신의 패망을 뜻했다. 그러나 성서의 신은 계속 외쳤다. 당시 제사장 무리에게 온갖 욕을 들어먹으며 버티던 선지자들을 세워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과부와 고아를 너네가 괴롭혔으니 망해라. 가난한 사람의 머리의 티끌까지 탐냈으니 너넨 망해야 한다. 유해식품 팔아 돈 챙겼지? 사기치고 속였지? 너넨 좀 맞아야돼.

가난한 사람을 신발 한 짝을 받고 팔았으니 혼나야 한다. 누군가의 아들 딸을 성매매로 밀어넣고 그들을 팔고 심지어 자기 탐욕을 위해 자식을 불살라 바친 너네는 심판받아라. 네 나라에서 사는 외국출신 이웃들 괴롭히지 좀 말아라! 너네도 이집트에선 똑같았거든?

집에 집을 지어서 가난한 사람이 거할 곳에 없게 하는 너희, 너희는 그 집에 머물지도 못할거다 내가 부술거니까!

누가 제물 가져오라고 했냐? 내가 너네의 그 대단한 성전문을 닫고 싶을 정도다. 금식하지 말고 정의를 실천해. 너네가 역겹다고! 제발 뭘 바치지 말고 말을 좀 들어라.'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래. 내가 세운
너네 나라를 내가 직접 부술거야.
70년 동안 포로로 끌려가
개고생하다가 돌아와라

어릴적에 읽었는데도 센세이션이었다. 자기의 명성보다 자기가 만든 백성과 모델인 나라가 제대로 살길 바랬던 신.

인간의 수준에 맞춰 들어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글자의 성육신'을 한 신. 그리고 이거저거 율법만들어 다른 사람 억압하는 이들은 비록 매일 '자신의 이름을 덜덜 떨며 찬양'한다 하더라도 다 쓸데없다 가차없이 욕하고딱 두가지의 기본만 남기고 만든 율법을 스스로 간소화한 신(나를 좀 진심으로 좋아하고, 네 이웃을 네가 아끼는 것만큼 좀 아껴라! 이걸로 끝. 더는 남 가스라이팅하고 자와자와 하지마!)은 확실히 어린 내가 보기에도 다른 종교의 신과는 달랐다.

분명 그 성서에서 그랬는데 한국의 개신교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진걸까? 답이 안나왔다.

엉터리 설교가 많고 엉터리 번역을 그대로 유교에 접목해서 '가스라이팅'설교를 하는 목회자들. 또 그들에게 뇌를 맡겨놓고 조건반사 식으로 아멘을 외쳐대는 신자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니 맥이 풀렸다.




그 꼴을 보니 소위 신천지나 JMS나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 등등이 아무리 기존교회를 비판해도 하는 짓을 보면 쓰레기짓을 업그레이드해 참 후지게 사람 착취하는 게 빤히 보였다. 성서 어디에도 사람 차별해라. 특정 사람이 자칭 신이라 칭하고 헛소리해라. 착취해라. 공포심을 주입해라. 전도도 빼먹을 거 있는 사람 골라가며 해라. 사람 속여서 약취해라. 개인의 인격과 지성을 말살하라, 성도들 성착취해라. 멀쩡한 가정 파괴하라는 말이 없거든. 오히려 그런 인간들에게 혼쭐내고 그런 짓 하려면 아예 모이질 말아라라고 했지

교회 내에 창궐한 반지성주의, 교회란 데가 일단 사람이 모여있으니 먹을게 있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장 탐욕쓰러운 쓰레기짓을 맘대로 하는 행태들이 사람들을 낙담하게 하고, 그렇게 멀쩡한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 꼴을 보고 살며 답답해 하던 나. 어릴적부터 혼자 읽고 외우고 생각했던 성서의 근본과는 한참 멀어진 그들을 보면서 '도둑의 소굴'이 바로 저기구나 싶어서 결국 '가나안(안나가)'신도로 오래 지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078316.html


그렇게 여러 일을 겪고 헤매다가 장애인 인권엔 누구보다 진심이었으며 결벽적으로 정직하게 살던 교사 친구가 나를 '섬돌향린'교회로 인도했다. 그때 나는 그냥 비뚤어진게 아니라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 기대는 커녕 아 됐고 다 망했어 이러고 다녔다.



그러나 임보라 목사는 달랐다.
나는 그렇게 대놓고,
그 기득권 신자들이 미워하는
약자 편에 서서
직접 돌을 맞고 욕을 들어먹는
목사는 처음 봤다.
신학자 구미정 교수의 전투버전 이랄까?
그 분은 단지 성소수자 뿐 아니라
차별과 배제, 생존의 위협을 겪고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는 꼭 있었다.
돌아가시기전 까지 가장 애썼던 부분이 기장교단 내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부분이었다.
난 이게 이 분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섬돌향린교회에 잠시 몸담 직접 지켜보면서 대화했던 임보라 목사님. 소수자들의 대모와 전사로만 알려진 그분을 실제로 만나보면 선입견이 사라진다. 그분은 그저 고양이 네마리와 강아지 한마리를 세심하게 돌보고 부드러운 큰 언니처럼 맛있는 것을 해서 나누고, 사람들의 호의도 즐겁게 받아줄줄 아는 그야말로 생활인이다. 그러나 그 속에 날카로운 지성과 의분 그리고 약자들을 향한 감수성을 가득 담고 있다. 아름다움을 알고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까지 유신론자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건 여러 명의 임보라 목사들 때문이었다.


위의 사실은 돈종교의 제사장이면서 크리스챤이라고 호소하는 인간들. 특히 나같이 답없고 스스로를 실망시키는 바보만 줄창 쳐다봤다면 진작 무신론팀으로 이적했겠지.


그러나 임보라 목사를 비롯 내 주위의 친구들과 다양한 분들, 특히 없는 형편에서도 남에게 베풀고 제사라는 무익한 체계를 스스로 빠개버리고 그 당시 사람 같지 않게 며느리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대했던 우리집안의 두 할머니(외,친)를 보면 신앙엔 확실히 뭐가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가 다녔던 미션스쿨, 물론 빻은점도 많았지만 처음 세워질때는 대단했다. 배울만큼 배운 서양인이 남존여비가 끔찍한 형태로 시행되었던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와서 용감하게 몸바쳐 만들었거든. 그들이 만든 구한말의 여학교들은 애비의 노름이나 술외상값 혹은 살림밑천으로 팔려온 여자아이들이나 백정의 딸을 지옥에서 구해내 교육했다. 졸업생 중 몇몇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헌신했다.


외할머니는 개성사람으로 그들이 세운 미션스쿨 중 하나인 호수돈여고를 나왔다. 나중에 역사를 배우고 그제야 이해됐다. 외할머니의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태도가 어디서 나왔는지 말이다.


친할머니의 경우 참 용감하셨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시집가 남편의 학대로 고통받으며 사셨다 이후 전쟁으로 과부까지 되셨는데. 혼자 한글을 익히고 교회에 가서 스스로 세례를 받은 경우다. 곰살맞지만은 않은 츤데레, 매우 실용적이며 쿨했고 대체적으로 남에게 뭘 강요하질 않으면서 은근히 챙기고 베풀었다.


천덕꾸러기 딸들은 성서를 삶으로 살았던 이들 덕에 처음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게되었다. 나도 만나봤다. 대학시절 집이 갑자기 많이 어려워져 치과치료비 걱정을 하며 울던 내게 자기가 받은 장학금 중 일부를 편지와 함께 건넨 교회언니. 어릴때 부터 애비에게 경제적 착취와 폭력을 당해 사창가로 흘러들어 학대당하던 여자를 구해줬던 목사 사모를 봤고, 교회 청년부에서는 친족성폭력을 당한 어떤 언니를 무슨 천사떼처럼 둘둘 감싸고 아끼고 돌봤던 언니들을 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꽤 있었다.


사람들은 어릴 적 내가 줄창 봤던 성서에서 신이 요청했던 삶을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수 많은 고민과 기도 속에서 난 그들의 모든 수고를 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쉽지만은 않았던 내 삶, 실망할 것도 많았던 신앙의 길에서 내게 등대가 되어 주었던 귀한 분,

임보라 목사님.

죽음의 문을 지나 언젠가 만나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동안 온갖고생 하셨으니 그 나라에서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좋은 풍경 보시고

편히 쉬며 노실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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