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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play "December Dream"

10곡의 음악과 10개의 이야기

by Dolphin knows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들

1991년 결성된 전설의 재즈그룹, 포플레이.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는 건반주자이자 작곡가인 밥 제임스와, 베이시스트 네이선 이스트, 드럼의 하비메이슨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쭉 활동하고 있다. 이 세분은 그대로 이고 기타 주자만 세 번 바뀌었다. 리 릿나워에서 래리 칼튼으로 그리고 2017 하늘나라로 떠난 척 롭까지. 2012년에 나온 이 앨범은 단단하고도 조화롭게 멋진 곡들을 채워놓은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포플레이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한 사람이 튀기 보다는 여러 사람이 탄탄한 실력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참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곡 'December Dream'은 척 롭이 작곡했다. 척 롭은 브라이언 컬버슨과도 협업하며 길이 남을 곡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런지 척 롭이란 뮤지션을 그리워하고 기리는 콘텐츠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을 싫어하는 그야말로 방통숭이. 이 오지랖 넓고 비교하기 좋아하는 문화에서 괜히 나서봐야 흠만 잡힐까 봐 어디 구석에서 조용히 글자를 읽거나 뭔가를 보고 생각만 하며 지냈었다.

그렇다고 호기심이 없는 편도 아니어서 새로운 정보나 기회가 오면 귀를 기울이거나 가만히 관찰하고는 한 발을 담가본다. 그러다 '어 이거 좀 위험할 수 있겠는데'싶으면 바로 줄행랑을 치고.

그러다가 수년 전에 스페인어 학원에 기웃거리게 되었다. 소설가 '보르헤스'를 참 좋아했고 그의 작품에 매료된 시기가 있어 언젠가 그분의 소설을 원어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친구의 소개로 원어민 직접 기초부터 교습하는 신촌의 모 학원에 덜컥 등록을 해버렸다. 그 정도의 모험은 어떻게 감당이 되더라. 사교육 학원이나 인강만큼 탈주가 쉬운 곳은 없으니 말이다.


그 학원엔 홀 같은 곳이 있었고 거기에서 음식과 주류를 팔고는 한쪽은 유리로 구분해 놓고 거기서 교습을 했다. 그리고 주말이나 그즈음에 사람들은 남미나 스페인의 음악을 틀어놓고는 춤을 추고 때론 그쪽 문화 공연을 하기도 했다.

꽤 체계 있게 잘 가르쳤다. 그 원어민은 나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고 냉철한 부분도 있어서 언어 말고도 삶의 태도 등 배우고 싶은 게 많았다. 그리고 그 스페인어 수업은 영어로 이뤄져서(선생님이 한국어가 서툰 스페인 사람이라) 학생들이 한국인 말고도 다양한 외국출신들로 구성되었다.

뭐 그러다 친해지게 되고 말도 트게 되고 그렇게 되더라. 그곳은 학원이 아니라 복합문화 공간이어서 바 같기도 하고 레스토랑 같기도 하고 공연장 같기도 했다. 거기서 살사나 바차타 주크 등을 다양한 춤교습도 이뤄졌다. 가끔 선생님이 내게 '춤 안 배울래?'이랬다. 내 대답은 항상 'Me da miedo.'였다. 무섭다고 했다. 지금도 이 말을 잊지 않는 걸 보며 꽤나 자주 썼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계기가 생겼다.

거기서 몇몇 미국 여자애들과 친해졌는데 그 친구들이 춤 좀 배우라고 성화를 부렸다. 내가 말을 좀 잘 듣는다. 낯선 사람과 몸 닿는 거 끔찍해하는 나는 그 강력한 푸시에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일단 첫 단계로 동네 마트 문화센터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춤인 '플라멩코'를 배우게 됐다. 신기하게도 그러니까 이 방통숭이이며 남이 나 쳐다보는 거 싫어하고, 춤같은 정말 어색해서 절대 못하는 인간도 몸 움직이는 걸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다 결국 그 친구들에게 멱살 제대로 잡혀 이태원, 홍대 등등의 살사바에 끌려다니게 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엔 아 이게 뭐야 싶더니. 나중엔 아 그렇구나 까진 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살사 음악이 꽤 내 취향이었다. 알고 보니 라틴재즈의 한 갈래라고. 스페인어를 배우던 그 학원엔 '라틴음악공연팀'이 자주 와서 공연을 하곤 했다. 여러 공연팀이 커버했던 노래 중 내 맘에 드는 것이 많았다. Luis Enrique라고 꼭 슈퍼 마리오 닮은 아저씨가 부르는 노래가 꽤 세련되고 좋았다.

어색하기만 했던 살사댄스의 순간을 즐겁게 바꿔줬던 루이스 엔리께의 노래들. 노래도 노래지만 세션팀이 미쳤다. 특히 건반!

그리고 그 미국인 여자애가 제대로 배우려면 한국 살사 동호회 들어보라 해서, 역시나 말 잘 듣는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한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살사화를 샀다. 평소라면 절대로 쳐다도 안 봤을 반짝이 가득한 그것도 발바닥과 발목 아픈 힐을 사다니. 내가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이 살사화는 보기와는 달리 밑창이 매우 부드럽고 편했다. 역시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세계가 있다.


출처 : 신세계 닷컴

내가 몸치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았기에 '잘해야겠다'라는 부담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꽤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몸이 닿는 문제는, 시간이 잘 해결해 주더라. 누구든 처음이라 어색하긴 마찬가지니까. 그냥 나는 남들보다는 좀 더 나이들어 살사를 배우기 시작한 처지라 나보다 어린 애들에겐 '어휴, 네가 몸치 누나 리드해 주느라 고생한다. 연습해서 멋진 공연 해!' 뭐 비슷하거나 나이 좀 더 있는 사람에게도 '고생 많으십니다. 나랑 많이 연습해서 멋진 사람이랑 더 멋지게 추세요' 뭐... 이런 마음으로 임하니 또 그럭저럭 할 만했다. 무엇보다 일단 춤을 춰보니 유산소 운동 하나는 확실하게 됐다. 처음엔 20분도 못 버티고 헥헥대다가 나중엔 한 시간 두 시간도 버틸 수 있게 됐다.

공연할 기회가 좀 있었는데, 워낙 예쁘고 잘생기고 젊고 잘난 애들이 많아서 굳이 나 같은 몸치가 거기 들어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역시 대한민국이라 춤을 정말 잘 춰보겠다고 몸을 갈아 연습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이었다. 굳이 나까지 거기 동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매일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 하는 나와는 달리 일단 무슨 일이든 부딪쳐보고 아무래도 계속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성격이 화통하고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꽤 많았다. 물론 어디에나 또라이는 있었다. 나도 몇 또라이에겐 엇 뜨거라 하며 질려서 손 털기도 했으니까. 그나마 나는 술을 전혀 못해서 뒤풀이 자리엔 거의 가지 않거나 초반에 집으로 가버렸다. 그 덕에 떠들썩한 사건을 목격하거나 그 중심에 설 기회가 없었고 무엇보다 나란 사람은 남이 주목할 부분이 별로 없는 평범이었다. 특히, 그 세계에서 한 획을 긋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그들만의 뜨겁고 무시무시한 사연'의 주인공이 될 일은 저절로 피해 갔다. 지금 생각해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해 12월 갑자기 나는 사내정치에 질려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수년 만에 여유라는 걸 갖게 됐다. 하필 그때 같은 기수 공연이 있다고 했고 아 그럼 해볼까 맘이 생겨버렸다.


공연이라니, 세상에나


그렇게 총 8명이 공연연습을 하게 됐다. 참 다행인 게 그 공연멤버들이 성격이 하나같이 참 원만하고 좋았다. 특히 전체 안무를 짜고 리드하는 여자 동생은 키도 훌쩍 크고 성격이나 외모도 시원시원하고 매력적이라 같이 있으면 정말 즐거웠다. 매번 연습할 때 영상을 찍었는데, 그때 점검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 보면 정말 형편없었다. 이런 나를 어르고 달래 가며 공연 때까지 사람 꼴 만들어준 그 친구에게 경의를 표할 정도다.

그리고 공연 당일, 내가 좀 실수를 하긴 했지만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이게 성취감이라는 건가?

술자리 극혐하고 남과 접촉하는 거 싫어하고 조금만 신세 져도 무조건 갚아야 하는 <혼자가 제일 좋아> 형의 인간이 조금씩 변해갔다. 사람을 검증하고 검증해서 내 카테고리에 넣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개방성이라는 게 조금은 생겼다.

그리고 공연 과정에서 같이 밥을 먹고 연습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을 싸들고 응원 와주는 또래 여자애들을 만나 감동하기도 하고 뭐 그랬다. 신기하게도 나는 거기에서 괜찮은 여자들을 만났다. 그렇게 하나하나 친구라는 이름으로 수집되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내 안부를 묻고 필요한 때 큰 도움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 해 12월이 이제 수년 전이다. 그때도 지난 겨울만큼 추웠고 몸이 안 따라서 고생을 하긴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지하 연습실에서 사람들과 보낸 시간을 꽤 즐겁고 따뜻하게 기억한다.

지금은 체력이고 멘탈이고 다 안되어서 더는 춤을 추진 않는다. 그럼에도 평소의 나와는 정 반대로 살았던 몇 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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