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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Mar 17. 2023

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

10개의 노래와 10개의 이야기

고생스러운 여정 떠남과 상실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세계  
1485년 독일 작곡가 하인리이 이자크가 작곡한 곡으로, 르네상스 시대 노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가는 젊은이의 심경을 담담하지만 솔직하게 보여주는 가사와 아름다운 선율로 유명하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무반주곡을 부르는 합창단에서 일 년 남짓 활동했다.

그때 자주 부르던 곡이 바로 이 곡 '인스부르크여 그대를 떠나야 하네'였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생각난 책이 바로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었다.

노발리스(1772년 5월 2일 ~ 1801년 3월 25일)는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그의 본명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하르텐베르크. (출처 : 위키백과)


인스부르크여 안녕히
이제 나는 정든 곳을 떠나
낯선 거리를 헤매야만 한다네
나의 기쁨은 사라지고
이제 어디서 그것을 찾으리오
낯선 땅을 헤맬 때



지방 귀족의 아들인 하인리히는 그의 아버지가 말해줬던 '푸른 꽃'의 꿈을 꾸고는 번민한다.

하인리히는 그의 부모에게 그 꿈을 이야기하고 하인리히의 부친은 자신도 그 꿈을 꿨고

그 꿈속에 그의 모친이 있었음을 이야기해 준다. 귀한 아들이 계속 번민에 눌려있을까 봐 걱정한 그의

모친은 그를 걱정했던 그의 모친은 자신이 자랐던 고향 아우크스부르크로 데려간다.

그는 그곳으로 가는 길에 상인들이 들려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광부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광부들과의 만남인데

거기서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광부이자 현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보물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 아닌 세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땅을 파 들어가는 광부들의 고상한 열정에 감탄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실제로 노발리스와의 삶을 반영한다. 자연과학과 광물에 심취해 광산 쪽 일을 하기도 했으니까. 노발리스에게 광부란 땅을 비밀을 파내는 아주 고상한 존재들이었다는 게 눈에 띄었다.


노발리스가 시인과 은둔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광부의 삶을 보며

나는 어슐러 르 귄의 '땅속의 별들'을 떠올렸다. 종교지도자의 심기를 거스른 천문학자가 결국 학계에서 추방되어 땅에 들어갔지만 그 속에서 금맥을 보며 지식의 아름다움과 별들을 발견했다는 것.

특히 눈에 띈 부분은 하인리히가 동굴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을 본 것. 그러나 그 그림이 지금 시대가 아닌 고대시대의 복장으로 그려졌다는 것. 이 책의 신비로움은 바로 이 부분에 가장 빛난다.

그리고 결국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해 클링로오스라는 위대한 시인을 만나고, 그 위대한 시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한다.

그리고 갑자기 에로스와 소피(지혜), 파벨 등. 다양한 알레고리로 가득 찬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국 소녀의 눈동자'라는 표현을 누가 한 것 같은데. 현실과는 매우 다른 신화의 문법과 꼭 자동기술로 쓰인 것 같은 장면의 전환이 백미다.

이 소설의 1장은 그렇게 끝나고, 2부 실현에서 하인리히는 아내와 아이를 잃고 혼자 헤매는 존재로 등장한다. '가엾은 순례자'가 된 하인리히는 1부에서 꿈과 환상에 가득 찬 젊은 귀족 청년의 옷을 벗고 중년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자세로 삶과 꿈에 대해 좀 거리를 두고 반추한다.

슬프게도 이 2부는 노발리스의 죽음으로 미완으로 끝나버렸다.


문학은 글을 매개로 전달되는 예술이고,
 노발리스는 특히 '시'에 대해 찬미했다.
이 소설은 아주 커다랗고 신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환상적인 그림과 같다.
모든 묘사들이 회화적이며
이 소설에서 나오는 시들은 하나같이
노래로 불려 전달된다.

처음엔 잘 자란 귀족 도련님의 몽상 정도의 인상을 받았는데 거듭 읽을수록, 혼란한 현실 속에서 '한 줌의 순수'라도 찾으려고 애쓰는 상처 입은 지식인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할 수 없으니 가장 평화로운 시대의 순수한 영혼의 화자를 만들어 세상을 읽어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뭔가 순수하고 매우 아름답지만 이상하게도 그 환상 곳곳에 이상한 모순과 잔인함 그리고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슬픔과 상실이 보인다.


어린 시절 약혼녀를 병으로 잃고, 결국 자기도 병으로 요절하고 만 노발리스의 개인사를 무시할 순 없을 듯하다.

논리적으로 잘 짜이고 이야기 전개가 촘촘한 소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 있는 이런 소설도 매혹적이다. 곳곳에 신비한 전조를 뿌려놓고 그게 실현되게 만들며. 그 당시 신화와 문학 회화 음악과 지식을 가득 채워놓아야 연결할 수 있는 알레고리를 잔뜩 뿌려놓는 작가의 마음을 읽는 과정자체가 즐거웠다. 특히 이 소설은 작가의 요절(29세 때)로 미완으로 끝나버렸기에, 그 애틋함이 남다르다.



영미나 독일 문화권의 소설에서는 꼭 '순례하는 젊은 남자'가 나온다. 조금 잘 사는 남자라면 부모를 떠나 '기숙학교'로 간다. 모든 사람이 그러진 않겠지만 부모는 어느 순간은 자녀를 떠나보내고 자녀도 부모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을 헤매고 비바람을 맞으며 순례자나 훈련자의 고초를 감당한다. 그러나 거기서 사람은 성숙한다. 생각 없이 살 수가 없는 환경이고 타인과 부딪치며 적절한 거리를 가늠하게 된다. 무엇보다 적절한 분리는 개인이 가족의 트로피나 부속품으로 남지 않고 한 인간으로 제대로 성숙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봤다. 끈끈함보단 담백함, 넓음 보단 깊음이, 관계보다는 사색이 이 지역 문학 속에서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좀 그랬다. 자취방이나 창녀촌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된장국을 그리워하는 한국문학 속 인물보다는 낯선 도시에서 마른 빵을 씹으며 먼지가 폴폴 날리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걷는 인물 쪽이 훨씬 어른 같다고 느꼈다.

난 내가 그동안 '사대주의'인가 싶었는데, 그저 취향의 문제였던 것 같다.


스스로를 위험에 던지고 어둠 속으로 홀로 들어가야
그제야 조력자가 나타나고,
자기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해야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생의 열쇠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테리 길리엄 감독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과 '러블리본즈'가

최근엔 영화 '그린 나이트'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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