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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Mar 13. 2023

Lyle Mays "Highland Aire"

10곡의 노래와 10개의 이야기


바람이 부는 귀퉁이에 사는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wJhuiRFUskU



팻 메스니 그룹의 영혼을 담당했던, 라일 메이스. 머리와 마음이 온통 혼란스러웠던 나의 십 대 시절, 이 분의 차분한 위로 덕에 겨우겨우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다. 1953년 생인 이 분은 2020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음악과 영혼을 나눴던 친구 팻 메스니는 그에 대한 추모글을 남겼고, 사후에 라일 메이스가 상을 탄 것을 개인 계정으로 축하하는 등 그를 누구보다 꾸준히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룹활동도 했지만 솔로음반을 자주 냈는데, 그중 하나가 1986년에 발매한 이 'Lyle Mays'라는 앨범이다. 'Mirror of my heart'등 훌륭한 수록곡이 잘 담겨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앨범. 레이블은 Geffen. 처음 이 곡을 들었을 홀로 높은 데 올라 바람을 맞으며 세상을 관조하는 내가 보였다. 서늘한 위로 라고 해석하고 싶다.  


어딜 가도 그들은 일본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니라서 괴롭고,
또한 어디서는 일본인 어디서는 조선인이라서 괴로웠을 테니까.



이전에 자이니치에 대해 관심이 좀 있어서 다양한 기사와 책 다큐멘터리 등을 챙겨보았다.


발레 대회에서 1등을 해도 일본 국적이 아니므로 1등을 넘겨줘야 했던 모 발레단의 재일교포 단장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어차피 해도 안된다는 씁쓸함과 담담함이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일본을 떠나 한국에 와서 자리를 잡는다.


작가이자 사회비평가인 신숙옥 씨의 ‘재일조선인의 가슴속’에서 묘사된 그녀의 삶도 그랬다. 어디를 가든 그녀는 이방인이고 단단한 벽이 아닌 얼기설기 짜인 움막에서 사는 것처럼 이쪽과 저쪽에서 부는 바람을 견뎌야 했다. 영화 ‘박치기’에서 묘사되었던 1960년대 재일교포의 삶. 북한 땅에 닿고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며 땅에 발 대신 두 손을 갖다 대는 10대 아이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 등에서 관찰한 것과 같이 일본에서 과거와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딪혔던 한계와 답답함을 기억한다.


개인이 가진 재능과 특유의 성실함만으로는 결이 다르고 자신을 미묘하고 ‘슬기로운 방식으로’ 배척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던 그들은 적법과 불법의 미묘한 경계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한 사회의 일원으로 무던하게 살아가거나 자신을 초인적으로 갈고닦아서, 유명 기업을 직접 만들거나 연예인이 되거나 스포츠 스타가 되는 등 제3의 길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전만큼은 차별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냥 곁에 있는 조금 다른 이름을 쓰는 사람이라고, 여권을 낼 때 조금 다를 뿐이라고 같이 학교에 가는 클래스 메이트이자 직장동료이고 일본인, 자이니치 할 것 없이 서로 웃고 떠들고도 지낼 수 있다는 이야기도 실제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생각에도 약간은 동의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발명이라고 하고, 특정한 나라의 사람이라고 혹은 조상이 아일랜드인이라고 전부 성 패트릭 축일을 다 기념하거나 기억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도 편견을 낳는 부분이므로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기억과 추억은 분명히 세대와 세대를 잇고 집단 무의식을 만들어 낸다고 본다. 명절에 먹는 음식 어릴 때 입었던 한복 등등. 사람은 일상의 무게에 눌려 살지만 어릴 적에 경험했던 언어와 음식 특별했던 만남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살다 보면 단단한 벽처럼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할 때도 있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 모든 것들이 부서지거나
일부가 부서져 몸에 찬 바람을 맞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경험상 그때가 굳이 나쁜 때는 아니라고 본다.
그때야말로 그전에 내가 보지 못했던
귀퉁이 쪽의 사람들을 볼 기회이고,
그곳에 삶이 숨겨놓은 보물과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미술관에서 거대한 회화 작품을 자세히 보겠다고 코가 닿을 정도로의 거리로 관찰한다면 정작 그 그림은 그냥 물감의 궤적밖에는 드러내지 않는다. 감상이래 봐야 뭐 당연히 붓이 이렇게 지나갔구나. 손바닥만 한 공간에 서너 가지 색채가 이렇게 흘러갔구나 정도 그러나 거리를 조금 두고 봤을 때 윤곽이 보이고 그 그림이 말하는 것이 들리기 시작한다.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파친코 구슬’도 내겐 꼭 그림과 같았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66679957


짧게 짧게 오사와 부인과 미에코와의 만남과 한국인 이민자인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그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듯 소설 자체가 담은 공간과 범위가 크진 않지만 뒷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윤곽이 짙어진다. 강렬한 사건이나 토로가 없어도 경계에선 주인공 끌레르의 눈과 감각을 덧입어서 책 속의 시간과 공간 관계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작가의 묘사는 담백하고 간결한 듯하면서도 날카롭다.


책을 읽기 전, ‘파친코 구슬’이라는 제목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꽤 컸다. 정상적인 경제활동과 사회참여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자이니치들. 1945년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면서 아직 일본에 남아있거나 전쟁을 피해 다시 일본에 갈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어려운 숙제가 던져졌다. 그래도 조선말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 조총련이냐. 아니면 아직 기를 쓰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남한의 민단이냐. 아니면 너무나 무신경하고 배려 없이 일본이 줘버린 ‘해방 전의 조선 국적’이냐. 그들은 재일 조선인이 될 수도 있었고 재일 코리안이 될 수도 있었고, 혹은 일본인으로 살 수도 있었다. 선택지는 많았지만 그들이 그 선택을 하는 것은 수많은 선물 중에 좋은 걸 고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대한 생존을 유지하고 마음을 되도록 최소한으로 다치는 방편을 고르고 현재까지 일본에서 살아오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중계해 주는 피겨스케이팅 경기장에 후원 팻말로 쓰여있는 마루한이라는 한글에서 받았던 미묘한 느낌이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재일 한국인인 주인공의 조부모가 선택했던 파친코 가게를 볼 때 되살아났다.


수많은 구슬들, 그 구슬들을 내려보내는 단조로운 팔의 움직임과 꼭 파도처럼 떠밀리는 소리들 그리고 구슬과 바꿔주는 참 심플한 선물들은 아마 기회가 열렸으면 그들이 이뤘을 수많은 기회들을 쓸어 보내는 물결 과도 같은 느낌을 줬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수많은 꿈들을 묻고 잊으며 적응하고 쌓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내게 있어 이 소설의 파친코 구슬이란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이 책에서 프랑스어로 표현된 ‘아이고 내 이쁜 새끼’ 같은 부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왜 하필 프랑스어 알파벳으로 표현했을까? 정말 백 퍼센트 프랑스 사람이라면 별 의미가 없는 외국 노인의 읊조림 정도로 들렸겠니만, 주인공은 그 말의 의미를 아는 반쪽은 한국인이다. 그래서 특별한 것이라 본다. 특정한 나라의 특정한 말이 발화자의 입에 담기고 그 뜻과 뉘앙스를 아는 사람의 귀에 음성을 타고 들린다면, 그 말은 관계 속에서 특별한 묶임으로 남는다.


버블 경기가 꺼진 뒤에도 일본은 변하지 않고 일관적인 사회적 틀이 공고한 나라였다. 일정한 틀만 잘 지키고 비슷하게 잘 따라가는 그런대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일본이라는 곳에서 굳이 일본 말을 배우지 않고, 특히 손녀에게는 하지 않는 할머니의 존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역사적인 사명도,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반목하기만 하는 강한 성격도 아닌 할머니의 태도는 그녀가 소설 안에서와는 달리 그 밖에 표현되지 않은 부분에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시간을 지내왔는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짧은 소설이지만 결코 거기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고 느낀 게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부서진 귀퉁이를 가지고 있었다.

 떠나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는 미에코, 그리고 바이링궐인 미에코의 모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상을 가지고 일본에 대대로 뿌리내린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 안정된 기반 – 그건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안정감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굳이 물어보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고 쓰는 말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날을 세울 필요도 없다.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에도 아무리 솔직하고 맘 잘 통하는 외국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어도, 헤어질 때쯤이면 몸과 맘이 많이 긴장했음을 느낀다. 언어가 다르고 나고 자란 곳이 다르다는 것은 말을 하는 언어도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제스처부터 마음의 방향까지 미묘하게 달라서 정신적인 힘을 많이 써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 내가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면을 이해하고 그들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묘한 부분들을 잘 집어내기도 해서 흥미롭기도 한다. 문화와 문화의 부딪침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부딪침과 발견이 생겨난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부모 밑에서 자란 주인공에게 그 태생적인 긴장과 균형을 잡는 면이 느껴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대하는 태도 그들의 갈등을 중재하며 나름대로 의미를 새롭게 만드는 부분이 나의 경험과 잇닿아서 이 책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에코를 대한 태도 등에서 기반이 단단한 사람들과는 달리 ‘틈’을 보는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주인공 끌레르는 부모와 연인과 떨어져 있으며, 딱 한 달간의 일본 생활에 적응하려 무던히 애쓰는 중이다. 하루하루 무미건조하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그녀의 감각만은 날카롭게 살아있다. 그녀의 시선은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쓰면서 그 가운데서 자유롭게 춤추는 10살짜리 미에코와 같은 곳을 보기도 하고, 전직 호스티스 출신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샌드위치 걸이 되어 광고판 가운데서 자신을 숨기며 소리치는 여자를 관찰하고 공감하거나, 떠나버린 사람을 그리며 밥을 먹는 미에코의 모친의 흐느낌을 잡아낸다.


주인공은 내내 뭔가 불편하고, 어색하고 적응을 못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냥 만남과 이야기도 심상한 것으로 지나지 않고, 묘하게 미끄러지는 그 느낌을 그대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적응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할머니 같은 사람들에게 더욱 깊이 연결되는 부분이 귀퉁이가 부서진 사람 혹은 단단한 벽이 아닌 바람이 불어오는 틈에 선 사람들의 장점이라고 본다. 이 책을 읽을 때 주인공은 불편했지만 독자인 나는 바로 그 부분에서 묘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 소설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인 바로 할머니의 미용실 부분이다. 불안한 나머지 머리를 끝까지 손질하지도 못하고 손녀를 찾아 나오는 나이 든 여인의 마음은 어디에 닿아있을까? 상상하게 한다. 그녀의 의사소통은 미용실에 가든 남편과 하든 미묘하게 미끄러진다. 일본인 사회에도, 그렇다고 재일 한국인 사회에도 끼지 않고 바람이 부는 한 귀퉁이에서 계속 흔들리는 문짝처럼 이곳에도 저곳에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열렸다 닫힌다.



끌레르의 조부 같은 경우는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위치나 역사 부분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고 어떻게든 현실에 자신의 방법대로 발을 붙이려고 하는 부분들이 보였는데, 그게 묘하게 안쓰러웠던 것은 작가가 할머니에 비해 묘사가 덜 된 할아버지의 서사까지 잘 다듬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가장 마음에 깊게 남은 부분은 이 모든 것을 고발이나 냉소로 쓴 것이 아니라 누구의 사연이든 어떤 이야기이든 날카롭게 감각하고 결국엔 이해하고 인정하려 드는 그 담백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미에코를 결국에 할아버지의 파친코 가게에 데려가지 않은 것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배려였고, 또한 주인공이 미에코와 함께 하이디 마을에 방문해서 그 일본인이 자신이 사는 스위스를 왜 이렇게 납작하고 전형적으로 묘사했을까 부분을 비판하는 대신, 10살 미에코의 눈에 담긴 호기심과 흥미로움을 같이 느끼며 바라봐 주는 것도 그 일환이라고 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결국엔 한국에 가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캐묻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이 아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이 문자로 묘사되지 않았어도 문자가 아닌 ‘흐르는’ 부분을 느끼게 만든 작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미에코와 주인공이 지붕에 올라가는 부분이다. 꼭 오래된 영화처럼 멈춰있는 풍경, 그리고 미에코가 준 로열밀크티를 마시며 스무 살의 차이가 나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다른 언어를 배우고 자라나 같은 언어를 골라 이야기하는 그들 사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설렘과 따뜻함을 보았다. 그날 저녁 그들 눈 안에 담긴 풍경을 상상하고 내 맘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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