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바꾼다
교장직을 수락했을 때, 이사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많은 배움의 기회를 드릴게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성장해 나가는 거예요.”
그 약속은 4년 동안 지켜졌다. 싱가포르 리더십 연수에서 만난 아시아 각국의 교육 리더들,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연수에서 경험한 창의적 교육 철학, 그리고 수많은 워크숍과 세미나.
매번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교육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
무엇보다 값진 건, 세계 각지에서 온 열정적인 교육자들과의 인연이었다.
교장직을 맡은 지 2년쯤 되었을 봄, 이사장님이 말했다.
“오늘 우리 그룹의 새로운 CEO를 만나볼 거예요. 해외 교육 컨설팅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영국 분이에요. 많은 도움과 자극이 될 겁니다.”
회의실 문을 열자, 그녀가 있었다. 크리스틴. 금발에 파란 눈, 마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악수 속에서 느껴진 단단한 에너지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첫 대화부터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 교육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가장 큰 한계는요?”
“국제적 관점에서 이 학교만의 차별화된 가치는 무엇인가요?”
그 순간엔 몰랐다. 이 한 시간이 내 인생의 나침반을 완전히 바꿀 줄은.
크리스틴이 CEO로 합류한 후, 나는 매주 한두 번 회의를 통한 멘토링을 받았다. 처음엔 긴장으로 입이 마를 정도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통찰력에 매료되었다. IQ 160, 사진을 찍듯 기억하는 능력, 중거리 육상선수 출신의 승부근성과 끈기까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미국식 교육 프로그램 도입을 논의하던 자리에서 그녀가 말했다.
“미국 교육만 알아서는 반쪽짜리예요. 영국의 교육 시스템도 경험해 보세요. 영국 교사 자격증에 도전해 보는 건 어때요?”
그 말은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다. 나는 얼마나 좁은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또 다른 날에는 이렇게 조언했다.
“리더십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선생님들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것, 그게 진정한 교육 리더의 역할이죠.”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나를 한 단계 성장시켰다.
1년 반이 흐르며, 나는 더 단단하고 자신감 있는 리더로 성장해 있었다. 그 무렵, 크리스틴은 우리 학교에 오기 전 장기간 몸담았던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 교육청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영국 본사의 한 국제학교 그룹 중동 총괄 CEO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출국을 앞두고 그녀가 말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여행을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늘 서울에만 있었거든요.”
우리는 2박 3일 부산 여행을 계획했다. 해운대 해변을 걸으며, 해동용궁사의 알록달록한 연등을 보며, 달맞이길을 거닐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 날 새벽, 해운대 바다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던 순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더 큰 무대에 설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한국에만 머물지 말고, 더 넓은 세상에서 가능성을 펼치세요.”
그 말은 바다 너머의 일출처럼 내 안을 환하게 밝혔다.
서울로 돌아온 며칠 후, 크리스틴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가 맡게 될 그룹 산하 국제학교에서 유치원과 초등 저학년 교장을 찾고 있어요.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 있는 미국식 교육과정 학교인데, 인터뷰를 해보시겠어요?”
아랍에미레이트. 중동. 내게 그곳은 화려한 마천루와 사막,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이 전부였다.
가족의 걱정이 눈에 선했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높아 보였다. 그러나 부산 바다에서 본 그 일출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말도.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어? 안전한 곳에만 머물러 있다가 후회하고 싶지 않아.’
결국 나는 답했다.
“해보겠습니다.”
인터뷰는 영국 본사의 교육 디렉터와 화상으로 진행됐다.
4년간의 리더십 경험과 교육 철학,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정을 차근차근 전했다.
며칠 후, 합격 메일이 도착했다.
손이 떨릴 만큼 기쁘면서도, 두려움이 스쳤다.
가족들은 흔쾌히 응원해 주었다.
“좋은 기회네. 넓은 세상에서 많이 배우고 와라.”
“우리 딸이니까 어디서든 잘할 거야. 걱정 말고 도전해 봐.”
든든한 지지 속에 나는 다시 가방을 꾸렸다. 이번에는 훨씬 더 큰 가방을, 전혀 새로운 세상을 향해.
크리스틴이라는 멘토를 만나지 않았다면, 부산의 그 일출을 함께 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선택이었다.
때로는 인생의 가장 큰 변화가 한 사람의 한 마디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출국 전날 밤, 짐을 다 싸고 창밖을 바라봤다.
내일이면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어떤 아이들을 만나고, 어떤 동료와 함께하며, 어떤 나로 성장하게 될까.
두바이의 뜨거운 사막 바람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그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