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한국인이라는 무게
인천공항을 떠나 두바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 창밖에 흩어진 구름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과연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맞을까?
한국, 캐나다, 미국에서의 경험이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지만, 중동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 앞에서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40도를 훌쩍 넘는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얀 칸도라를 입은 남자들, 검은 아바야를 두른 여성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득 채운 세계 각국의 사람들.
“인종의 전시장”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캐나다의 모자이크도, 미국의 멜팅 팟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문화가 섞이지 않고, 각자의 색을 선명하게 간직한 채 공존하고 있었다.
두바이 티콤의 한 비즈니스호텔. 가구와 가전이 갖춰진 이곳이 한 달 동안의 임시 집이었다.
학교 비자를 받아야만 집을 계약하고, 차량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미리 ‘차 없이도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을 찾아두었지만, 그 선택의 무게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화려한 두바이의 야경 속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한국에서 쌓은 인맥도, 미국에서 함께한 친구들도 이곳에서는 닿지 않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첫 출근 날, 눈앞에 펼쳐진 캠퍼스 규모에 숨이 멎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자리에 모인 거대한 국제학교. 내가 맡게 된 유·초등부만 해도 학급 수가 30개가 넘었다.
각 학년 6~7개 반, 반마다 25명 안팎의 학생들. 한국과 미국의 작고 아늑한 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었다. 첫 주부터 업무는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학사 일정 조정, 교사 배치, 학부모 미팅, 커리큘럼 점검…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9시를 넘겨야 집에 도착했다.
거울 속 얼굴은 하루 만에 5년은 늙어 있었고, 피로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 와중에 영국 교사 자격 과정을 온라인으로 병행해야 했다.
“주경야독”이란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때 크리스틴이 없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CEO로서 하루가 분 단위로 바빴지만, 그녀는 나를 딸처럼 챙겼다. 두바이로 이끈 사람으로서, 끝까지 잘 적응하도록 돕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어느 토요일, 주말 내내 침대에만 누워 있던 나를 그녀가 깨웠다.
“Get up, sleepyhead. We’re going somewhere special.”
그녀가 데려간 곳은 카이트 비치였다. 하얀 모래와 코발트빛 바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버즈 알 아랍의 실루엣.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다를 바라보자, 답답했던 가슴이 환하게 열렸다.
파도 소리에 묻히듯, 그녀가 말했다.
“하루하루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 순간 알았다. 이건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여정이라는 것을.
두바이의 국제학교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첫 해에는 12학년 학생 한 명, 둘째 해에는 형제 두 명. 교직원 중에서는 나 혼자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나를 더욱 궁금해했다.
2016년 당시엔 학교 복도나 길거리에서 이런 질문이 흔했다.
“Are you Japanese? Chinese? Ah, Korean! North Korean or South Korean?”
BTS가 빌보드를 휩쓸고, 기생충이 오스카를 거머쥐고,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기 전이었으니까.
처음엔 서운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 그건 부담이면서도 특권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K-pop, K-drama, K-food는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지금 내가 있는 푸자이라의 학교에도 한국인 교직원은 드물다.
처음엔 나 혼자였지만, 이제 남편과 함께 두 명의 한국인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 늘 같은 다짐을 품는다.
“우리는 이곳에,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서 있다.”
그 다짐은 매일의 선택과 태도에 무게를 더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자부심이 된다.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
두바이에서의 3년, 푸자이라에서의 현재. 낯선 땅에 내디딘 첫 발걸음이 어느새 누군가에게 한국을 알리는 창이 되었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또 다른 출발선을 걷고 있다.
그 길 끝에는, 내가 아직 만나지 않은 수많은 얼굴과 언어, 그리고 서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이 기다린다.
어제 광복절을 맞아, AI로 복원된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을 보았다. 낡은 흑백 화면 속에서 들려온 떨림 어린 목소리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건네는 살아 있는 메시지 같았다.
그들의 노래가 우리에게 자유와 희망을 물려주었듯, 나 역시 이곳에서 매일 한국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서 있다. 이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UAE 국제학교에서 교감으로 살아가며, 낯선 땅에서 배운 작은 깨달음을 기록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으로 다음 여정도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