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일 때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내 장래희망은 한 번도 바뀐 적 없었다. ‘교사’.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그 사이 계속 바뀌었다. 순수했던 초등학생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와, 나도 저 선생님처럼 멋진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롤모델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스승복(福)이 남달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자 좀 더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세상에는 멋진 선생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뒤에서 욕을 많이 먹어 장수할 것 같은 선생님들도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안정적인’ 직업이어서였다.
그 즈음 나는 내 성격에 대해 과하게 비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었고, 어른의 삶이 조금씩 현실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을 느끼던 참이었다. 말도 조리 있게 잘 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내가 일반 기업에 들어가 일을 하는 모습은 스스로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절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등학생일 때부터 쥐고 있던 ‘교사’라는 장래희망은 달랐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할 일만 잘 해낸다면 직장에서 해고되는 악몽은 겪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런 관점은 고등학생 시기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 스무 살이 되던 해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막상 입학하고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제 정상적으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한다면 당장 초임 교사가 되는 것인데(물론 임용고시 합격은 정말 어렵다. 오죽하면 ‘고시’겠는가.), 상상을 하니 조금 아찔해졌던 것이다. 매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몇 십, 몇 백 명의 학생들을 상대하는 데 쓰는 삶. 그냥 놀아주는 것도 아니고 학문을 가르쳐야 하고 품행을 가르쳐야 하는 자리. 그때까지도 스스로의 내향성에 대해 긍정적인 재구성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기에,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직업적 특성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해보지도 않은 일에 겁이 정말 많았다. 교사의 길을 임용도 한 번 치르지 않고 포기한 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시 그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게 사실이다. 고민 끝에, 흔히들 내향인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곤 하는 학자의 길을 걷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데 대학원은 생각과 너무 다른 곳이었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앉아 책상에 코를 박고 자기 연구에만 집중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론 연구에도 협업이 이어졌다. 자연히 같은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과의 관계, 교수님과의 관계, 타 연구실 사람들과의 관계와 같이 개인연구 외에 신경을 써야 할 일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순진하게도 이런 걸 피해 보고자 대학원을 택했던 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엄혹한 현실 앞에 나는 기존의 관점을 모두 내려놓고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보기로 했다. 내가 그걸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연기를 해서라도 만들어 내보자. 그러자 신기하게도,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속속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사람들을 화합했다. 당연히 원래 잘 하던 사람에 비해 서투르긴 했겠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그런 일들을 잘 해냈다. 피하지 않았다면 보다 빨리 알 수 있었을까. 어쨌든 막다른 골목에서 갑자기 날개가 돋아난 듯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직장 생활 중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때로는 스스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제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그 직업은, 아니 직장생활은 도무지 잘 해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나 자신은 이제 없다. 내향인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직업’도, 없다고 믿는다. 영업직은 그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