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이야기 | 출가를 결심하게 된 순간
이 글은 브런치북으로 엮기 위해 재업로드한 글입니다.
(원문: https://brunch.co.kr/@hhy134/13)
이제는 김장밖에 남지 않았다. 밭에는 오직 2500 포기의 배추가 남아있다. 12월 둘째 주에 김장이다. 그전까지 영하 7도까지 내려간다고 하자, 배추들에게 이불 덮어주었다. 고생한 만큼, 달달할 거다. 유기농인만큼, 고소할 거다. -라고 믿고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제주도에서 당근밭을 하셨다고 했는데, 언니와 나는 그걸 거의 성인되어서야 알았다. 본업이 아니셔서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그만큼 밭일에 무관심 했던 내가 정신차려보니 경주 근처에서 농사를 짓게 됐다.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는 나도 한때 '대학', '경영경제학과'를 가면 좋다는 사회, 어른들의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 테스트를 몸소 했었다. 대학 가기 전에는 대학만 가면, 경영학과만 전공하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 행복과 자유가 보장된다는 듯 착각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것들은 다만 '당연한 배경'이 될 뿐, 여전히 인생의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참고로 나의 인생 문제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다. 그 안에서도 또 쫓아야 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행복하려면'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대학 입학과 전공 선택, 두 번의 뒤통수를 맞은 후 얼얼함이 가실 즈음, 슬슬 졸업 시기가 다가오자 친구들은 취직, 고시 등을 고민하는 분위기였다. 로스쿨, 대학원, 유학, 취직 등 다양한 선택지 아닌 선택지들이 주어졌지만, 내 눈에는 '대학'과 '경영학과'를 선택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정답 인생을 향해 달려가지만, 사실 저것이 끝이 아니다는 걸 알았다. 대학을 가도, 경영학과를 전공하고 있어도, 좋다는 무언가를 해도 공허함이 계속될 것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 속에서 정답을 들이미는 사회에 있어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이 정도는 살아야 한다.'
그래서 전혀 다른 환경, 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게 시작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교환학생이라는 모범적인 기회를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래서 전혀 연고가 없으면서, 아주 뜬금없는 기준으로 교환학생 나라를 골랐다.
'비 올 때 비 맞고 다녀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자전거를 실컷 탈 수 있는' 나라,
네덜란드!
딱이다. 영어로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내가 '대학'하면 상상했던 소규모 수업이었다.
한 학기 8주
한 학기 최대 수강 2과목
과목당 일주일에 수업 2번
재학생 기준,
평균 수업 1번을 위해서 공부하는 시간 8시간
한 교실에 최대한 15명.
3-4명이 한 조.
학생들이 수업 진행, 문제 풀이, 질의응답 진행.
일상적인 수업 참여 태도로 성적 결정
시험 100점 맞아도 수업 참여율이 낮으면 학점 낮음
Maastricht에 있는 University of Maastricht(UM)
나름 매 학기 성적 장학금 받으면서 학교 다니고 있었기에 여유 있게 지망한 학교에 파견 갈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뭘 할지 모르면 뭐라도 해봐야 한다는 체감했다. 뭘 할지 모를 때 학생으로서 일단 해보라는 공부는 충실히 하니 어떻게든 쓰이는 걸 느꼈다.
정말 새로운 환경
전혀 모르는 사람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한국 대학교의 1학기는 UM의 2학기였다. 첫 학기는 정말 신나게 학교 다녔다. 수업도 재미있었고, 조별활동도 재미있었다. 연극부도 들었다. 네덜란드 친구들도, 홍콩 친구들도 사귀었다.
두 번째 학기는 아예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유럽을 돌아다녔다. 런던에서 3박 4일 가있는 동안 뮤지컬 7편 봤고, 제인 오스틴이 살던 베스를 가고, 거기서 우연히 영화 '설득'(2007)의 광장도 보았다.
여전히 내 성격대로 우당탕탕이긴 했다. 오로라 보러 아이슬란드(Iceland)를 가려다가 c를 r로 착각해서 아일랜드(Ireland)로 여행을 갔다. 그래서 그 곳에서 정말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모로코도 가서 아프리카 대륙을 밟아보고, 스카이다이빙을 위해 체코 프라하에도 갔다. 결국 날씨가 안 좋아서 스카이다이빙은 못 했지만.
아주 천혜의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런. 데.
실제 생활에서 나는 틈만 나면 걱정, 우울해졌다.
돌아가면 뭘 할까.
뭘 해 먹으면서 살까.
연대까지 나왔는데, 저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정도'에 해당하는 일은 너무 하기 싫다.
그런데 '어느 정도' 수준이 안 되면, 내가 주변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10주 넘게 같은 고민을 하니, 제대로 현타가 왔다. 나는 굳이 일부러 지구 반바퀴를 돌아, 전혀 모르는 사람, 정말 새로운 환경에 왔는데, 결국 똑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 이건 환경을 바꾼다고 내 괴로움이 해소가 아니구나, 결국에는 '내'가 바뀌어야 하는구나하고 깨달았다.
내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하늘 끝, 저 바다 끝까지 가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죽었다 새롭게 태어났다 치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던 '법륜스님'
그 스님은 자유로워 보였다. 비록 내가 당장 실천은 못하지만 그 스님이 말하는 대로 살면, 정말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 당시 당장 실천을 못하겠다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20살이 넘으면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지원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반납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서 약속을 하고, 그리고 정말 갚는다. 사회에서 내 힘으로 일단 생존을 하고, 그 다음 점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그런 인생.
당시 아버지가 내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계셨다. 나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의존적이었다. 알바를 해도, 내 추가 용돈이었다. 아버지가 지원해 주시는데 안 받는 게 바보다-라는 말에 어물쩍 넘어갔다.
반면 내 심리는 정말 위축된 상태였다.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생존'할 자신이 없었다. 늘 당연히 주어지는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나는 20년 넘게 평생 소비만 했지 생산적이거나, 이 세상에 내가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이 말하는 그 독립과 자유, 책임은 무섭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컸다.
출가는 집을 불사르는 거라고 한다.
집은 안온함과 안락함이지만,
동시에 굴레이자 속박이다.
둘 다 받거나, 둘 다 불사르거나.
나는 평생 자유를 갈망해 왔다.
그래서 정말 자유로워져 보기로 했다.
그래서 불살라보기로 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래, 그 진리가 도대체 뭔지 - 끝까지 가보자.
네덜란드에서 학기가 끝나자, 동유럽을 여행하자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16주가 끝나자마자 바로 나는 귀국했다. 가족들에게는 귀국한다는 걸 미리 알리지 않았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
'저 한국 왔어요'
그리고 4개월 뒤, 나는 이대 미용실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