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야기 | 비구니 동생을 둔 언니의 소비론
자, 동생이 불교에 귀의한 후 같이 살던 집은 오롯이 내 차지가 되었다.
전세도 아니고, 무려 자가다. 부모님이 딸들 서울 생활 팍팍하지 말라고 아주 오래전에 매매해 둔 28평 아파트다. 30년이 넘은 아파트다 보니 10년 전 입주할 때 아빠가 리모델링까지 해주신, 자취라고 하기엔 꽤 좋은 집이다.
나는 맥시멀리스트였다.
집이 넓다 보니 언제나 공간이 있기에 사고 싶으면 그냥 샀다. 물론 월급이 작고 소중하니, 기분에 따라 저렴한 것들을 여러 개 사서 바꿔가면서 썼다.
그렇게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모르는 물건이 하나 둘 늘어났다.
무거웠던 오랜 연애가 끝난 날 문득, 가벼워지고 싶었다.
혼자 사는데 왜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할까?
어느덧 내 나이 30대. 월급은 더 이상 적지 않아졌고, 머리가 커진 만큼 내 취향도 뚜렷해졌다.
그만큼 가벼운 미니멀리스트의 삶이 살고 싶어졌다.
100일 간 하루에 한 개 버리기 챌린지
20대 초반의 나는 서재 같은 인테리어의 거실을 꿈꿨다. 그래서 거실에 어마어마한 양의 책과 책장이 있었다. 사실 이 수 백 권의 책은 장식일 뿐 거의 보지 않았다. 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다는 허세에 안 읽은 책이 쌓여 있었다. 다시는 들춰보지 않을, 흉기 같은 무게의 대학 원서는 추억이라는 명분 하에 쌓여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책장이 흔들려서 나를 깔아뭉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슈퍼 N이다.
그래서 찬찬히 집을 둘러보았다.
아니, 내 입술은 하나인데 립스틱이 왜 이렇게 많아?
신발이 너무 많아. 지네야?
그릇이 도대체 몇 개지? 파티해?
층간소음도 문제 되는 세상에 피아노가 웬 말이야.
자전거를 얼마나 자주 탄다고, 자전거가 있지? 따릉이 타면 되는데.
도대체! 왜! 믹서기는 왜 3개나 있지?
지난 2년간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거나, 처분했다.
엄청난 양의 책은 쓰레기 수거 서비스를 불렀다.
화장품은 내용물을 모두 분리시킬 수 없어 종량제 봉투에 때려 넣었다.
책장과 주방용품은 모두 당근에 올려 무료 나눔 했다.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모를 물건은 모두 없앴다. 아무리 비싸도 필요 없는 물건이라면 가차없이 버리고, 다른 이에게 가서 더 좋은 쓸모를 한다면 기꺼이 보냈다. 그렇게 비싼 가죽코트, 우리의 추억이 담긴 피아노, 심지어 엄마의 유품까지 보냈다.
다 보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 알았다. 내가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추억이지, 물건이 아니라는걸.
금방 지칠까 봐 한 번에 하지 않았다.
100일 간, "하루에 한 개 버리기"라는 나만의 챌린지를 했다.
일주일이면 하나의 큰 쓰레기, 작은 쓰레기 여섯 개를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버렸다.
주말에 피아노를 처분하면 다음날에는 안 쓰는 화장품 하나 버렸다.
그렇게 천천히 미니멀리스트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삶
버리는 것이 힘드니 사는데 신중해졌다. 쓸모없는 물건을 사는 소비가 줄었다. 생각 없이 하던 소비를 만 원, 천 원씩 줄여나갔다.
아무리 저렴해도 옷을 하나 살 때마다 일주일씩 고민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 입는 옷은 처분한다. 저렴한 옷, 비싼 옷 가리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입었을 때 기분 좋은 옷만 남겼다. 이제 무슨 옷을 입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다고 내가 합리적인 소비자가 된 것은 아니다.
10년 전, 재활용센터에서 50만 원짜리 냉장고를 샀다.
기능상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정이 안 갔다.
올화이트 비스포크 냉장고를 샀다.
40만 원짜리 중국산 스마트 TV를 쓰고 있었다.
기능상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테리어에 맞게 화이트 TV가 갖고 싶었다.
삼성 더세리프 TV를 샀다.
거실 책장을 무료로 없앤 대신, 재택용 책상을 사고 싶었다.
콘센트가 매입되어 있는 널찍한 책상을 일룸 데스커에서 찾았다. 카페 느낌 나게 벤치도 샀다.
덕분에 혼자 사는 집에 6인용 테이블만 두 개다.
책장을 없애고 나니 텅텅 빈 거실에 둘 소파가 갖고 싶었다. 내가 눕고도 남을 큰 소파가 갖고 싶었다.
그래서 4.5인용 패브릭 소파를 마련했다.
나는 키 160159.4cm의 혼자 사는 사람이다.
더 이상 부려먹을 동생이 없었기에, 집을 자동화시켰다.
모든 조명과 스위치를 연결시켰다. 침실에 암막 커튼도 달면서, 스마트 레일을 설치했다.
이제 새벽에 암막커튼이 열리며, 무드등이 켜지고, 구글이 나를 깨워준다.
안녕하세요, 뱅디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날씨는 ~
이걸 본 옆 동 사는 사촌오빠가 말했다.
우리 집은 콩고고, 너네 집은 맨해튼이야.
이젠 집에 가격을 떠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 차 있다. 천만 원을 썼고, 행복해졌다.
이렇게 나는 철딱서니 부잣집 딸내미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동생은 나날이 가난하고 뻔뻔해졌다.
언니, 청약은 깨도 되는 거야? 나 돈이 없어서 깨려고.
용돈 달라는 신종협박인가?
그렇게 난 100만 원을 뜯겼다.
괜찮다…. 알고 보니 아빠는 서른 넘은 비구니 딸에게 200만원이 넘는 노트북을 보시하셨다.
아빠 집이 내 집이 되는 순간,
나는 독립을 했다.
같은 집이어도 아빠의 돈과 명의에 얹혀살고 있을 때에는 아빠 집이었는데, 내 취향대로 꾸미니 어느 순간부터 내 집이 되었다. 아빠는 왜 쓸데없이 돈을 썼냐, 이 물건들이 뭐가 문제길래 바꾸냐는 잔소리도 안했다. 그저 딸이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지켜보셨고, 딸이 혼자서도 잘 사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셨다.
애초에 아빠는 이 집을 본인 집이라고 한 적도 없고, 딸이 "독립"한 집이라는 개념이 명확하셨다. 어쩌다 서울집에 오실 땐 꼭 허락을 맡고 오신다. 아빠는 나의 보호자로 계속해서 나를 컨트롤할 것이라는 나만의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우리 아빠는 내 생각보다 더 지혜로운 교육관을 지니고 계셨다. 동생과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리의 눈을 엄마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엄마의 손을 거두고 나니, 아빠는 정말 좋은 아빠였다. 아빠는 그저 딸들을 사랑하기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의 인생은 딸의 것이고, 당신은 그저 도와줄 뿐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딸을 진즉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하고 있었다.
독립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아빠가 지원해준만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거나, 키운 만큼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다 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엄마는 떠났고, 아빠에겐 고마움과 사랑만 남았다.
그렇게 난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했다.
▼엄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빠를 미워한 동생(과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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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동생을 둔 언니의 투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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