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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Feb 05. 2020

독일은 왜 노벨상이 나올까?

여성 학자의 예외적인 도전, 그 이전에 학자가 있다  

학자로서 노벨상의 의미는 뭐라고 해야 할까. 우선 내가 속한 사회과학은 노벨상이 없다. 흔히 아는 경제학 노벨상은 스웨덴 국립은행에서 창립한 것으로 사실 정식 노벨상은 아니다 (하지만 정식처럼 다뤄지며 수상자들은 통상적인 기준으로 위대한 학자가 맞다). 그래서 마음 편한 관점에서 짐작해 보자면, 노벨상은 옆 집이 좋은 외제차를 장만하는 것과 비슷하다. 겉으로는 축하도 하겠지만 내심 묘하게 마음 불편한 그런 것. 학자라고 세속적 시샘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런 감상도 노벨상을 받고서야 가능하다. 한국은 노벨상에 대한 담론이 반반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저력에 대한 기대감 내지 믿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교육 내지 연구 구조를 탓하는 기조가 더불어 섞인다. 맞다, 한국인의 저력은 놀랍다. 노벨상을 제외한 기술이나 예체능 분야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과 시점에서 불쑥불쑥 오롯이 솟아 나오는 돌연변이들이 있다. 이렇듯 드물지만 전체적으로 꾸준히 유지되어온 현상들이 개방된 공간에서 논해질 때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적 환경에 "불구하고"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인 편이다. 


독일인이 수상한 노벨상은 2019년 기준으로 화학 29명, 물리 25명, 의학 17명으로 경제학, 문학, 평화를 제외하면 총 71명이다. 그나마 한국과 비교할 만한 것은 (?) 그중 여자는 한 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 개의 수상 분야의 국제 통계 상 여자는 20명이기 때문에 독일이 유난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노벨상 받기는 어렵다. 연구와 과학은 어렵고 운도 따르기 때문이다. 한 번 학업을 시작하면 생각지 못한 계기로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동료 그리고 특히 지도교수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여기까지는 학문 특유의 좁디좁으면서도 모호한 성취의 영역이자 학문의 조직적 특성의 영역이다. 그 외의 요소에는 사회와 국가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어느 요소가 더 큰지는 모르겠다. 


독일도 외적인 요소, 즉 사회와 국가의 영향이 적지 않다. 자유로운 유럽의 기관차인 독일이라고 이런 장벽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의 환경을 좋게만 묘사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현지 학계의 장벽과 씨름하는 연구자에게 결례일 수 있다. 


알고 알아본 만큼 아는 것이니 오늘의 기사를 보자. 독일의 유일한 여자 노벨상 수상자이자 생물학 연구자와의 인터뷰다. 이전에도 이 분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여자로서 학문에서 성공하려면 화장도 하지 말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는 뉘앙스였다. 연구자의 자세는 그만큼 타협이 없다는 뜻이었던 걸로 이해했었다. 이런 느낌은 사실 한국 특유의 "죽어라 노력하고, 젖 먹던 힘까지, 안간힘을 쓰는" 악바리 기질에서 더 친숙한 것인데, 독일인에서 아주 드물게 비슷한 걸 느꼈던 경우였다. 기자의 질문을 Q, 답변을 A로 표기한다.


Q: 뉘슬라인-폴하드 씨, 어제 너무나 우연적으로 당신의 생물학 선생님 아래서 수학한 여자분을 만났어요. 프랑크푸르트 쉴러 학교에 문딩 박사님이요. 학생들은 그녀를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불렀다면서요. 

A: 우리가 절대 그랬을 리 없어요! 그녀는 멋진 선생님이었어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줬어요. 생물학의 위대한 발상들을 예로 삼아서. 유전학, 생리학, 행동생물학- 모두 대학에 가기 전에 배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을 갔더니 다 너무 재미없어서 엄청나게 실망했죠. 


Q: 좋은 학생이셨나요? 

A: 수능성적이 나쁜 편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좋게 봐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일찍부터 독립적이었거든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일은 하지 않는 자유를 나 자신에게 허락했죠. 


Q: 과거의 교사가 비고란에 썼었죠. "크리스티아네가 열정을 느끼는 데서는 학생으로서 남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하기 싫은 것은 못한다." 

A: 최악이었죠! (*1이 최고 점수, 6이 최하위 점수일 때:) 수능에서 4점이 세 개 받았어요. 영어, 라틴어, 물리학 과목에서요. 언어를 잘하는 편인데 단어 외우는 건 도저히 억지로 못하겠더라고요. 


Q: 그만큼 생물학은 더 좋아했죠.  

A: 5학년에 모든 나뭇잎 모양을 찾아오라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때 혼자 나가서 정말로 하나만 빼고 전부 찾아내버렸죠. 


Q:  교수님의 열정을 응원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A: 어머니가 저의 관심을 인지하고 동물 서적을 많이 선물하셨어요. 자연을 향한 제 호기심은 컸죠. 닥터 두리틀(*동물과 말을 하는 수의사가 주인공인 동화 시리즈) 전작을 읽었어요. 아버지는 후에 많은 생물학 고전들을 사주셨어요. 당시에 유명 출판사의 백과사전 시리즈에서 포켓판으로 처음 발행되는 중이었죠.

 

Q: 그중 인상 깊은 책이 있었나요? 

A: (일어서서 책상 속에 주저 없이 손을 넣어 꺼낸 책 속의 헌정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이거요. 콘라드 로렌츠 (오스트리아 연구자이자 1973년 의학/생리학 노벨상 수상자). "1955년 성탄절, 엄마 아빠가 크리스티아네에게". 이걸 읽고 행동 생물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Q: 달팽이를 사육했다고 들었어요. 

A: 경주를 시키고 싶었어요. 주위에 달팽이가 많았어요. 서로 경주하게 만들었죠. 수학 선생님과 생물학 선생님은 제게 과학적 접근을 할 능력이 있다고 일찍부터 인정했어요. 그런데 수능 때 최고 점수인 1점을 안 줬죠. 아직도 가끔 생각하면 화나요. 


Q: 왜 2점만 받았죠? 

A: 반항심이 있던 내게 복수하신 것 같아요. 문딩 선생님은 제가 시험을 잘 못 봤지만 그래도 1점을 줄 것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Q: 여학교를 다녔죠. 어땠어요? 

A: 단점이라면 남자애들을 만나면 쑥스러웠던 것. 장점은 그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던 것. 수학과 과학 과목은 그게 중요했어요. 지능이 아닌 자신감, 공격성, 자만심의 차이거든요.


Q: 교수님의 조부인 프란츠 폴하드는 유명한 내과 전문의였어요. 증조부는 화학을 전공했는데 스승이 그의 대부였던 폰 리빅(*독일 화학의 위인)였죠. 가족 중 여자보다 남자의 영향이 컸나 봐요. 


A: 어머니는 보육원 교사였고 5남매를 키우기 위해 직업을 포기했어요. 13살쯤 됐을 때 내게 지적인 자극을 더 이상 주시지 못하는 걸 느꼈죠. 하지만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 멋졌어요. 합리적이고 수더분했어요. 마냥 감싸고돌지 않고요. 엄마가 절 만지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좀 까다로웠어요. 


Q: 아버지는요? 

A: 발명가셨고, 매우 다채로우셨고 카리스마가 대단하셨어요. 내가 뭘 하는지 항상 흥미를 가지셨어요. 본인은 건축가셔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자연 관련 주제들과 접점이 없어서 그러셨나 봐요. 


Q: 수능 완결 기념 파티 때 동물의 언어에 대한 연설을 했죠. 아버지께서 응원하고 지원했다고요. 

A: 병상에 계셨는데도요. 스위스에 스키를 타러 가셨다가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에 계셨어요. 거기서 몇 장 짜리 편지를 써주셨는데, 이렇고 이런 말을 하면 어떠니, 넌 할 수 있잖아, 라는 내용이었죠. 


Q: 그러고 곧 돌아가셨죠. 

A: 수능 구두시험을 끝내고 귀가했는데 큰아버지가 계단에 서서 말해주셨죠. 


Q: 연설은 했나요? 

A: 슬픔에 빠져 있었죠. 그래도 결국 문딩 박사님께 갔어요. 함께 모든 걸 의논했어요. 그러고 연설을 했죠. 최근에 다시 읽어봤는데 썩 나쁘지 않던데요. 


Q: 대학 새내기 때는 어땠어요?

A: 동물학 강의는 어찌나 지루했는지 바로 줄행랑쳤죠. 그러다 생리학을 들었어요. 첫 강의 때 교수님이 개구리를 꺼내더니 머리를 잘랐죠. 나가버렸어요. 피를 못 봐요. 후에 튀빙겐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실습 기간에 배운 게 없어요. 실험은 툭하면 실패하고. 흥미로운 강의는 없고. 우리끼리 뭉쳐서 책으로 공부했어요. 


Q: 뚜렷한 목적이 있었어요?

A: 별 생각이 없었어요. 교수가 되려고 했던가? 그런데 그러면 가족계획은? 빨리 남자를 찜하지 않으면 노처녀가 될 판이었죠. 그때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때 관습이 그랬듯 일찍 결혼했어요. 제 두 언니도 그랬어요. 그리고 모두가 결국 이혼했죠. 


Q: 그 시절 여성 학자들 중 본보기나 모범은 없었나요?

A: 제 위에 여성 교수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수학자 무팡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건 완전 예외였죠. 


Q: 1964년 튀빙겐 대학으로 이직해서 생화학 전공을 시작했어요. 많은 남자 학우들과 함께.

A: 학생을 지도하는 화학 실습 강사 중 제가 첫 여자였어요. 지원할 때 저를 이상하게 쳐다봤어요. 여자가 이걸 할 수 있나? 이렇게. 그래서 너희들이 여자를 안 써봐서 그렇다,라고 말했더니 자리를 주더라고요. 


Q: 졸업은 2점으로 마쳤고 그다음 박사과정을 시작했죠.

A: 박사논문을 시작했는데 좀 해보니까 답이 없는 거예요. 반면 학우 한 명의 프로젝트가 아주 재밌어 보였는데 너무 어려워서 쩔쩔매더라고요. 제 지도교수님조차 실패하고요. 그리서 나도 껴달라, 함께 하자고 제안했죠. 처음엔 되는 게 없었어요. 지도 교수는 제게 심하게 욕을 했어요. 다 때려치우기 일보 직전이었죠. 그때 본때를 보여주마!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본때를 보여줬죠. 


Q: 그런데 관련 논문에 제1저자로 기재되지 않았어요.

A: 거의 모든 실험을 제가 했고 논문 작성도 제가 했는데 말이죠. 지도교수 왈, 제 동료는 아내와 아이가 있어서 커리어가 절실하고, 그래서 앞에 기재해야 한다고 했어요. 저에게는 "너 결혼했지 않았냐"라면서, 앞길 걱정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고요. 연구소의 그 누구도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Q: 그럼에도 계속하게 된 원동력은?

A: 문서 상 지도교수는 다른 분이었어요. 그분은 좋은 연구자를 영입하는데 능했는데 그중 미국에서 온 박사 후 연구원 두 명이 있었어요. 그들은 성공하고자 했고 교수직을 노렸어요. 저도 그들의 연구분야인 발생 생물학에 관심이 생겼어요.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관련 서적을 읽었어요. 유전학 그리고 날파리 얘기는 실제로 그때 배웠어요 (*노랑초파리: 유전학 실험에서 널리 사용하는 모델 생물). 


Q: 노랑초파리를 이용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어요. 이게 내 분야다!라는 확신이 몇 살 때 들었나요?

A: 32살이요. 전문으로 삼을 분야는 일찍 선택해야 해요. 


Q: 후에 하이델베르크 연구소에서 공동 수상자와 함께 연구했죠. 어디서 만났나요?

A: 바젤 대학에서요. 그곳에는 게링 교수가 막 미국에서 돌아왔었어요. 매우 유명했고 아주 젊은데도 불구하고 생물학 센터로 임명되어 노랑초파리 연구소를 운영했죠. 아주 유능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분이었어요. 저처럼 발생 생물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본인은 뛰어난 유전학자가 아니었죠. 제 공동저자는 그가 지도하는 대학원생이었어요. 


Q: 게링 교수는 여자가 뛰어난 연구를 못 한다고 믿었어요.

A: 그걸 저희에게 매일 느끼게 해 줬죠. 여성 동료가 하루는 대놓고 물었어요. 여자는 뭘 특별히 잘하냐고 생각하냐고요. 그는 "도예!"라고 답했죠. 저는 웃으면서 방을 나갔어요. 


Q: 그런 식의 경시에 대항할 방법이 있었어요?

A: 연구! 실험 결과가 엄청 새로웠고 분야는 떠오르던 참이었어요. 


Q: 1985년에 막스 플랑크(*독일 내 여러 최고 연구소를 관리 및 경영하는 독립 비영리 연구 기관) 산하의 발생 생물학 연구소의 원장이 됐어요. 그때도 경시의 목소리가 있었죠.

A: 제가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죠. 막스 플랑크 계열의 원장들에게 제공하는 시설의 1/3만 주어졌어요. 그래도 전에 받던 것 보다야 두 배인데,라고 생각했죠.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직 제안을 가지고 본인을 포장해서 협상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저는 그러기엔 너무 둔했어요. 


Q: 독일의 과학 상 중 가장 권위 높은 라이브니츠 상을 수상했을 때, 연구의 활동폭이 넓어졌죠.

A: 상금이 떨어질 때쯤 예일대에서 명예박사를 수여했어요. 그걸로 용기를 냈죠. 막스 플랑크 본부장이 있는 뮌헨으로 갔어요. 지원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했어요. 9분 후에 돈을 받고 나왔죠. 


Q: 본인의 의지를 관철한 때가 많아요. 모범이 될 인물이 있었나요?

A: 항상 외톨이였어요. 교수 면담을 한 적도 없어요. 모든 걸 혼자 떠맡고 실패도 마찬가지였죠. 


Q: 그런 부담감을 어떻게 해소했어요?

A: 음악은 제게 매우 중요해요. 피리를 나쁘지 않게 연주할 줄 알아요. 엄청 좋은 성악 선생님도 계셨고요. 음악 할 때의 저는 딴 사람이에요. 


Q: 오늘까지 연구소에서 일을 하죠. 매일의 삶을 바짝 살고요. 어떻게 쉬나요? 

A: 퍼즐을 하면서요. 볼래요? (책장에서 박스를 꺼낸다. 그 안에는 얇은 나무판을 섬세하게 잘라 만든 퍼즐이 모여서 듬성 듬성하게 완성 중인 고전 회화가 보인다) 이건 제가 실톱으로 직접 만들어요! 


Q: 실험정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진로를 추천하나요?

A: 다른 사람 말을 너무 귀담아듣지 말고, 직접 결정하고 생각할 용기를 가질 것. 많은 이들이 생각할 용기를 가지지 않아요. 그리고 집중해요! 정말 본인에게 중요한 건 뭔가요? 이걸 알아낸 후에는 자꾸 다른 일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아요. 


Q: 여기 거실에는 작은 유화들이 많이 걸려 있어요. 대부분 스케치 단계 아니면 미니어처예요.

A: 제 할머니가 그렸어요. 제게 큰 모범이 되셨고 제가 그때 알던 유일한 전문직 여성이었어요. 그녀는 화가였고 진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지녔던 드문 여성 중 하나셨어요.


학자로서 위의 역경의 서사를 읽는 감상문을 말하자면 여성이어서 느끼는 답답함과 학자라서 느끼는 답답함이 공존하는데, 그와 별개로 학문의 어려움은 성별과 상관없다. 여자 대 남자 학자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이 똑같기 때문이다. 연구, 오직 연구, 그리고 남의 의견을 적당히 무시하는 일방적 고집. 여기서 적당히라는 말은, 겉으로는 듣되 속으로는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주에 대학원생이 박사 디펜스를 한 후, 우리 연구소 동료가 덕담을 건네며 "남의 의견에 아무 관심 없어져야 박사 받을 자격이 생기는 거야"라고 농담조로 말하는 걸 들었는데, 최근 들은 말 중 가장 맞는 말이었다. 그는 한 달에 논문을 5개 써내는(것 같은) 논문 괴물이다. 그는 반드시 교수가 될 것이다 (안 되면 내가 직접 피켓 들고 베를린 가서 데모하겠다). 하지만 교수직은 마음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서, 박사 후 연구원과 정교수 사이의 직위에 약 7년째 머물러 있다. 일을 5년째 쉬고 있는 교사 아내와 미취학 아동 두 명을 키우고 있다. 봉급이 풍족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독일의 생활 환경은 결핍 속에 살지 않게끔 허락해준다. 아무리 국가 복지가 좋다고 해도 결국은 계약직인 박사 후 연구원을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은 100명 중 한 명이다 (원래는 0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있는 동료 중 괴짜가 한 명 있다). 종신 전의 학자는 씨름선수의 안간힘으로 "버텨야"한다. 그래서 자아를 흩트리는 비판과 소음에 최대한 "무감각해야" 이긴다. 국가, 구조, 문화 등이 초래하는 자원의 부족이나 현실적 압박은 같은 학자들이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밖으로 나도는 폴리페서를 싫어하는 이유다. 그 한 자리가 내 박사 후 연구원 동료가 받아야 할 자리다. 외로운 역경을 돌파할 정도로 자아도취적이어야 학자로 성공할 수 있다지만, 종신을 얻고 성공한 후에 버튼을 누르듯 이타적으로 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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