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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Mar 16. 2020

독일의 코로나 대응은 신속할까?

불평 아닌 비판을 하는 방법

생사가 오가는 위기에 처하면 "역시 선진국은 잘한다더라" 식의 담론은 무용지물이 된다. 시민의식의 위상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화장실 휴지 대량 구매 같은 비상식적인 현상을 통해 민낯을 드러낸다. 그러니 더욱더 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하며 변화를 고안하기에 이상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 겉치레가 들통나는 시점은 위기상황일 때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에게는 그럴 책임이 있다.


동시에 정부와 시민들은 전 세계에서 좀 더 긴급한 난관들을 당장 헤쳐가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부와 개인 간의 평소의 관계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한국만 봐도 각종 정부 대응에 대한 반응이 갈리기도 하고 국소적으로 극하게 뭉치기도 한다.


동시에 한국과 독일 두 국가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한국에서 독일이 배울 수 있는 부분은 파급의 제한(내지 늦춤)과 시민 여론의 예측이다. 이 말고 한국의 높고 효율적인 검사력도 거론되는데 그중 독일이나 미국이 단기간에 차용할 수 없는 부분들은 당장 큰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자국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국의 자료가 쓰이는 양상이 이따금 눈에 띄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보건 시스템의 스피드는 한국이 독일보다 백 보 앞서 있었다. 독일은 원래부터 10분 남짓의 진료상담이라도 병원 예약이 한두 달 걸리는 것이 보통이어서, 아예 아침부터 가서 앉아 있어야 빈 시간에 "얻어걸릴" 수 있는 전략이 통상적이다. 왜 이런지에 대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쉽게 접근하자면 한국의 배달문화가 왜 그리 신속한지와 비교하면 되겠다.


지금 정황 상, 위기를 전달하는 말들을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되기 때문에, 나는 오늘 주제를 고수하되 조금 장기적인 시야를 취하는 기사를 다루려고 한다. 다르게 말하면 미리 "앞서서" 정부의 대응을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쓴소리라는 뜻이다. 현재 독일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은 명실상부 최선일 테이고, 현재 원탁에서 어려운 결정을 논하는 자들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하지만 비판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이럴 때일수록 불평과 비판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기사는 앞으로 이어질 비판들의 초석과도 같다. 독일의 주요 주간지 슈피겔의 편집장이 기고한 글이니, 국가의 주요 언론인이 작정하고 밝히는 견해라고 보면 된다.


사망자 수를 취합할 때가 다다르면 정부와 국가들은 불편한 자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위험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으며, 확실한 행동을 취하지 못했을까?

보카치오가 쓴 책 "데카메론"은 중세시대 흑사병 폭주 시대의 격리에 대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10명의 귀족들이 격리를 위해 피렌체로 피난 온 후, 서로에게 푸는 "썰"들이다. 썰의 내용은 사랑, 배신, 간신, 욕심, 욕망, 박탈, 죄, 사죄 등으로, 쉽게 말해 인간을 이루는 근본적인 재료들에 대한 것이다. 이는 지금처럼 위기의 시기일 때에 특히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코비드 19라고 명명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흑사병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우리 삶을 극적으로 바꿀 것으로 보인다. 유럽처럼 부유한 나라들도 보건 시스템의 결핍을 체험할 것이며 병원과 응급실은 참혹의 현장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육전 전쟁터처럼 의사들은 곧, 누구를 치료하고 누구를 포기할지, 누구에게 산소를 투여하며 누구는 방치할지를 결정하기에 이를지도 모른다.

앞으로 몇 달간 수십만 명이 발병할 것이며, 분석치에 의하면 수만 명이 중태에 빠지고 수천 명이 사망할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이 신속하게 혹은 보다 느리게 진행될지에 의해, 우리가 마주 보는 것이 위기인지 파국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늦추기 위해 전 세상은 이제 아주 빠르게 아주 조용해질 것이다.

중국은 오래부터 대부분 폐쇄됐고, 이태리는 문을 닫았으며, 지역들은 전면 격리됐으며, 유럽과 미국 간의 항공로는 거의 중단되었다. 유럽의 일상은 주춤한다. 오랫동안 기획한 축제, 학회, 공연들은 취소되고, 질병은 모든 인간적 계획을 한숨에 지워버린다.

목요일 저녁에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월요일부터 모든 대학, 학교, 유치원의 폐쇄를 지시했고, 이로서 수백만 가정들이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몇 주와 몇 달간 파국의 시나리오가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인간은 결국 행동하기보다 희망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우한에서 작은 뉴스 조각들이 처음 들려오던 새해부터 지금까지, 사실상 문제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수학 그 자체다. 그리고 수학의 속절없는 법칙들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그저 느낌에 따라서 말이다.

시민 개개인에 한해서는 당연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부와 국가들은 지금 시국에 도저히 이해를 바랄 수 없겠다. 코로나의 위협에 관련된 그들의 실책들은 이미 용서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그들 아니면 누가, 중국에서 드문 드문 건너오는 비보들에 담긴 위험을 알아챌 수 있었을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이란, 미국 등의 모든 해당 기관들과 당국들의 책임은 이 전염병의 충격을 최대한 축소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 아닌가? 그들은 직무유기를 저질렀다.

모든 게 지나고 나면 현재의 논쟁들 중, 축구시합이나 대축제, 박람회, 학회의 취소에 대한 것들은 우습게 느껴질 것이다. 대신 태만한 시간낭비에 대한 정당한 질책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각하게 될 것은, 이번만은 트럼프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 사이의 차이가 평소보다 작았다는 사실이다. 둘 다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으며, 분명한 행동의 실행이 이루어지고도 남는 시점에 그리 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 특히 독일인이 사는 행정의 세상에서 결단력 있는 행동들이 부족하다. 유럽연합 국가들이 큰 틀에서 벌이는 행실이 독일의 연방주의에서 학예회 마냥 다시 재현된다.

하지만 이번만은, 사상자를 세고 난 후에 필수로 근본적인 시스템 회의가 시급하다. 위기의 상황에서 연방 보건 장관이 정말로 중요한 결정에 앞서서 16곳의 연방주 대표들과 회의를 거쳐야만 하냐는 것이다.

논할 건은 예를 들어, 대규모 축제를 취소하는 결정을 카니발 연합에게 위임해야 하냐는 것이다. 왜 독일 아이스하키 연맹은 선견지명을 발휘한 반면, 독일 축구 연맹인 분데스리가는 소심하게 행동했는지 분석해야 될 것이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위기에 보다 적합하게 반응하기 위해 좀 더 좋은 중앙 집권적인 방법들이 없는지 논해야 될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말이 맞다면, 현재 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남과 연대하는 재능이 얼마나 모자른지 (그것도 모든 면에서) 일 테다.

병원에서 마스크와 소독제가 도난됐다는 비보들은 참 씁쓸하기 그지없다. 텅 빈 파스타 선반과 화장지 대거 구매에 대한 뉴스도 마찬가지다. 질병과의 사투에서 중국인들이 범한 (확실하지 않은) 실수들에 대해 국내에서 논쟁할 때 느껴진 공감능력 부족과 자만심은 정말 창피했다.

그리고 현재, 바이러스가 우한에서 국내 변방까지 옮겨온 지금, 북부 프랑스와 남부 이태리, 오스트리아 서부에서 종식되는 이때, 적지 않고 특히 고령의 사람들에게 가시적인 생명의 위협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기침하는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닌다. 열이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다. 마치 그들 혼자서 세상에 존재하듯이, 아무리 인권이 중요하다지만 무지한 배려 없음 또한 권리인 양.

애석하게도 단체들도 별다르지 않다. 유럽의 국가들은 그들의 연합을 생명력과 의미로 채울 기회를 또 하나 잃고 있다.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유용하고 이 바이러스가 국경과 시민권을 깡끄리 무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은 자신의 좁은 국경 속으로 자신을 욱여넣기만 한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포퓰리즘적인 언성들까지 높아진다. 그들은 범인을 원하며, 국제적 문제를 해결할 국제적 방안을 찾는 대신에 병명과 외국인을 마구 섞어버린다. 또다시 각자도생이다.

이렇게 안정감과 이정표를 향한 모색은 불안하게도 불발한다. 다행히 모든 국가에 한 명쯤의 바이러스 전문가가 존재하며 냉철한 언어로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한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당황은 너무 티가 난다. 유럽연합처럼 UN 또한 자신의 조직을 감당 못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들의 역할인 희망의 상징으로서 실패한다는 뜻이다.

개개인은 리스크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약하다. 그것은 기후 변화에도, 바이러스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올바르고 지혜로운 행동을 위한 규칙은 모두 알고 있지만 너무 안 지켜지고 있다. 혹은 그 반대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념적으로 과장된다. 불확실한 위협을 마주했을 때 적정점을 찾기란 어려운가 보다. 사람들이 로또 확률을 말도 안 되게 과대평가하듯이, 아직도 많은 이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파괴 잠재력을 과소평가한다. 후폭풍이 따를 것이다.

공공 생활이 종식되는 지역에 사는 것이 어떤지를 많은 이들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삶을 새로 정돈해야  것이다. 보육원과 사무실은 문을 닫고, 시내는 폐쇄구역으로 지정될 것이다. 이태리 도시들의 사진들은 어두운 미래 영화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게 우선은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우한에서는 이미 몇 달 째의 삶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한은 멀리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것이 첫 주요 실책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고 모든 다른 실책을 통해 배우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결말에는 10명의 젊은 귀족들이 격리  귀가한다. 그들은 열흘  서로와 이야기를 나눈 후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많은 시간을 동서남북의 여러 곳에서 보내야  판이다.


독일에서 살고 독일인이나 다름없는 한국계 사회학자에게는 어떤 의무가 주어질까? 공공 시스템을 굴러가게 만드는, 혹은 위험의 장으로 몸소 걸어 들어가는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영웅이다. 나 또한 시민으로서 자신과 남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1차적으로 있으며, 2차적으로는 학자로서의 사명을 어떻게 발휘할지에 대한 생각 또한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의료 연구진도 아니니 별도로 진득하게 할 일, 혹은 받아야 할 영향이 있으리라. 이건 따로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유형의 변화, 혹은 발전이기는 하다. 연구는 정체성이기도 하니까.

 

연결되는 주제가 독일의 연방주의이지만 이건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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