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문제 될 때
소신발언과 막말의 경계는 희미하다. 어쩌면 점점 그렇다. 누가 공개 석상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전해주는 미디어의 개수와 형태가 역사상 가장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다양성이 새로운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는데, 미디어 형태뿐 아니라 의도까지 다양하다 보니까 전해지는 발언들을 비틀어서 정보의 질을 낮추는 양상이 높아진다. 자료가 불량하니까 소신발언과 막말의 경계가 더 희미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정치에서 막말의 역할은 소금 같아서 빠질 수 없다. 말이 소신발언이지, 반대파가 보기에는 그냥 막말일뿐더러 가끔은 강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강하게 말해야 할 때도 있고, 안하무인의 상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강하게 말해야 할 때도 있다. 정치에서는 매 순간 일어나는 상황들이 아닐까.
하지만 소금도 과유불급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례로 한국 사람들은 십중팔구 독일 요리가 너무 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젓갈이나 김치, 라면도 의도치 않게 나트륨 과섭취의 원인이다). 소금 섭취를 통제하는 것이 혈압관리에 중요하듯, 막말의 허용 가능한 경계를 지키는 것이 정치문화의 건강에 중요하지 않을까.
지나친 막말은 나쁘다는 인식 정도는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특히 막말이 자기 자신을 향할 때 말이다) 문제는 상대편이 악하다고 생각될 때 생긴다. 나쁜 놈에게는 어떤 욕을 퍼부어도 시원하기만 하듯, 정치적 반대 진영이 얼마나 눈꼴시면 저런 말을 하고 또 환호를 얻을까 싶기도 한다. 자기편에 한정된 환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사이다" 발언으로 여겨지는 정치적 발언들은 사실 사이다가 아니라 그냥 재미있는 싸움 구경이다.
내가 한국으로 석사를 하러 갔을 때 정치인 막말의 수위가 높다는 인상이 나를 한동안 놀라게 했다. 여기에는 언어의 이유도 있고 (한국어와 독일어 간의 문학 번역을 할 때 한국어의 감수성이 더 야들야들하다) 한국 정치의 맥락적 이유도 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 막말 수위가 독일보다 높다고 결론짓기에는 조심스럽다. 막말을 제조할 언어와 재료가 한국에 더 풍부하기는 한 것 같다만, 막말을 들었을 때 입는 감수성의 타격은 한국이 더 높은 것 같으니까.
만약에 중도 성향의 한국인이 전반적으로 막말을 불편해하는데도 정치 막말의 수위는 꽤 높다면, 정치인들은 전략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확실치 않다.)
오늘의 기사는 최근에 막말로 선을 넘어버린 튀빙겐시 시장 보리스 팔머 (녹색당)에 대한 것이다. 그가 그간 한 막말로 알려진 사건들은 적지 않다. 그는 원래 페이스북을 통해서 자극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키워드 워리어 이미지가 강하다. 이전에는 독일 철도의 광고가 비백인 독일인들만 출연시키자 대체 어느 나라 얘기냐고 공개 지적한 적도 있고, 얼마 전에는 코로나 환자 중 노인들을 두고 "일 년 이내에 어차피 죽을 사람들을 살리고 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해버렸다. 이런 종류의 발언은 국민도 불편하게 여기지만 본인이 속한 당의 반발도 대단했다. 녹색당 수장과 의원들은 그를 대놓고 공개 저격하는 중이다. 틀렸고, 냉혈하고, 녹색당이 절대 지지하지 않는 사회적 다윈주의라고 말이다. 오늘의 기사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본인의 해명을 살펴본다.
기자: 팔머 씨, 아침 뉴스 방송에서 하신 발언 중에 80세 이상의 노인들은 어차피 일 년 이내에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구제해야 하냐는 뉘앙스가 있었어요. 지금 사회적 다윈주의자라는 비판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게 놀랍나요?
팔머: 네. 저는 인터뷰에서 반대로 말했거든요.
기자: 문장 그대로 말했는데요? "까놓고 솔직하게 말해드릴게요. 우리가 독일에서 구제하는 중인 사람들은 어쩌면 일 년 이내에 어차피 죽을지도 몰라요. 연세 때문이든, 병력 때문이든 간에요."
팔머: 네, 하지만 바로 그다음에 한 말이 빠졌어요. 사람들을 그냥 죽게 두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우리의 방역 전략으로 인해 어린이 사망률을 높이는 역효과가 있다고 UN도 발표했다는 뜻이에요. 즉, 현재의 방역 전략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죠. 국민들을 희생시키면 당연히 안되고요. 그런데 그 대가로 빈민국의 불쌍한 어린이들이 희생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요. 전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기자: 독일 내의 노인 위험군과 제3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을 서로 저울질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팔머: 연관관계를 지적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해요. 그걸 돌려 말하지 않은 거죠. 다시 설명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지금 의도적으로 세계 경제 위기를 창조하고 있는데, 그건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코로나로부터 보호하는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결과적으로 얻는 것은 수명이 많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그로 인해 다른 사망 원인으로 죽는 것 뿐이에요. 반면에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어린이 사망률이 높아지고요. 연관관계는 확실해요. 도덕적 딜레마죠. 그래서 저와 5명의 지식인들이 함께 제안하는 해결책이 독일 최대 주간지에 실렸어요. 세계 경제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 방역 전략, 이것이 필요합니다.
기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면 왜 결국 망설이다가 독일 뉴스 연합에 사과문을 보냈죠?
팔머: 방역의 존재 의미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지적한 거예요. 하지만 그로 인해 지금 제 이메일 함의 2000개의 이메일 중 절반은 제가, 제 가족이, 제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내용이죠. 그들이 화내는 이유는 제 발언이 과도하게 단순화되어서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깨달았어요. 그 반대의 뜻이었으니 저도 한 마디 해야죠. 하지만 오해로 인해서 많은 국민들이 상처 받았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도 한 거죠.
기자: 이메일 작성자들은 저처럼 오해한 모양이네요. 가끔은 최대한 큰 관심을 받기 위해 오해를 일부러 만들어내시지 않나요?
팔머: 전혀 아닙니다. 저는 신념에 의해 움직여요. 우리의 방역 전력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다고 주장해요. 하지만 희생자들이 타국에 있으니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죠. 화나신 분들이 인터뷰 전체를 봤다고는 하시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원체 혐오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 초마다 발언을 따로 끄집어내서 최대한 강렬하게 지탄하는 것이 미션 같아요. 차라리 주간지에 실린 기사에 대해 반응해주면 제가 제시한 근본적 대안에 대한 대화가 열릴 텐데, 그건 또 반응이 하나도 없어요.
기자: 말씀하시는 "혐오 체제"가 이토록 잘 돌아가는 이유는 당신 같은 분들이 자극적인 SNS 글을 올리기 때문이기도 하죠. 당신이 논란을 끌어들이나요, 논란이 당신을 끌어들이나요?
팔머: 상호 작용인 것 같습니다. 애석하죠. 저는 혐오 문화를 배려해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순화시키서 평준화시키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도. 혐오 정치 문화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남을 최대한 빠르게 공개 처형하는 것이에요. 제가 이겨내야 하죠.
기자: 당신이 애초에 저격한 발언이 따로 있죠. 원로 정치인이 한 말인데, 국가가 모두의 목숨을 구할 수 없으니 자신이 만약 코로나에 걸린다고 해도 괜찮다고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신은 아직 47세에 불과한데요, 만약의 경우 본인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양보하실 수 있나요?
팔머: 아니요, 이게 정확히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저는 시장이니까 근무 중 타계한 직원들의 장례식에 자주 가요. 일 년에 한두 번은 있는 일이죠. 반면에 고령에 큰 업적을 남기고 타계한 분들도 있어요. 그런 데를 가면 큰 차이가 느껴져요. 전자의 경우 젊은 애기 엄마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부조리함에 모두 힘들어하고, 후자의 경우 때가 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받아들이죠. 원로 정치인이 하신 말씀에 저는 동의해요. 제 말도 그래서 동의하는 뜻일 뿐이에요.
기자: 하지만 그분의 발언에는 노인들의 생명이 더 가치 없다는 뜻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의 발언은 그보다, 전염병 연구자들의 원칙에 따라서 건강을 우선시하는 총리의 정책에 대한 숨은 비판이었죠.
팔머: 전략적 해석이죠. 그런 건 우리를 한 치도 발전시키지 못해서 저는 정말 별로라고 생각해요. 그분처럼 저의 주장은, 방역을 최우선시함으로 인해 다른 나라에는 사람들이 죽어난다는 것이에요.
[생략]
기자: 다 일리 있는 말인데, 당신이 소속된 녹생당조차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었어요. 녹색당과 밀당하시는 건가요? 탈당되는 마지노선을 탐구하기 위해?
팔머: 그건 아니죠. 그 반대예요. 제가 한 말이 노인들을 살인 수용소로 보내라는 뜻일리 없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도 않고 입장문 따위를 발표해대는 행태가 저는 너무 별로예요. 같은 정당인데도요. 너무 어이없어서 이해조차 안 가요.
기자: 터부를 침범한 후에 전부 다 오해고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패턴은 극우정당이 자주 써먹는 방법이죠. 그쪽에서 자주 호응을 받는 사실을 어떻게 보세요?
팔머: 저도 그건 너무 싫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 소신을 꼬아서 반대로 말하지 않아요. 극우정당이 내일 태양계의 중심이 태양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제가 굳이 지구가 중심이라고 반격할 필요는 없죠.
기자: 정당을 바꿀 생각은 혹시 없나요?
팔머: 아뇨, 왜요? 저는 뼛속까지 자연친화적입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우리만큼 진지하게 다루는 정당은 없어요.
논란이 일면 항상 반드시 양쪽 말을 들어봐야 하니까 팔머의 말도 들어보았다. 읽어본 후 내 짐작은 그의 당 내 입지가 애매하면서도 작지 않겠다는 것이다. 애매한 이유는 녹색당다운 당찬 언행과 녹색당답지 않은 특색이 섞였기 때문이다. 녹색당처럼 도덕적 이슈 선점이 강한 집단은 겉으로는 당차고 억세지만, 속으로는 정당의 분위기에 순응해야 할 필요가 높다. 그의 입지가 작지 않은 이유는 그가 이런 특색을 가지고도 아직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의 정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왜 도덕적 우위를 정체성으로 내세울수록 내부적으로는 서로 닮아야 하는 압박이 강할까? 아마도 옳고 그름의 자의적 틀을 만든 후 그 속에 들어가 있거나 나와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존재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수록 작은 "다름"도 정죄되거나 튀는 이유로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러한 집단적 특성을 떠나서, 정치는 결국 "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은 감을 잃기도 하는 것 같다. 팔머가 용감한 외골수 영웅인지, 어그로 끄는 난봉꾼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맞는 말보다 적당한 말을 해서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정치인의 감에 더 가깝기는 하다.
번외로, 막말처럼 들리는 말을 해도 정당 동료들이 모두 편들어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또 나름대로 문제다. 이건 다음에 다시 얘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