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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Feb 14. 2020

독일은 통일이 잘 되었나?

비교 불가한 것들과, 보편적인 것들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던 시절에서 많이 지나와서 이제는 좀 더 복잡한 의미들이 얽혀 있는 담론이 되었다. 그래서 통일이라는 프로젝트의 실행 가능성의 문제 말고도 통일에 대한 여론 유지와 형성도 무시할 수 없는 도전이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힘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해지는 통일이 한국의 통일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통일은 한쪽의 세력이 약화되고 종결되던 시점에 말 그대로 철옹성이 동독의 부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오직 한쪽으로 우르르 무너진 사건으로 간략하게 설명이 된다. 지금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기에는 한쪽의 약화의 시점이 다다르지 않았고, 이는 팽팽히 긴장하던 근육이 한계점에 이르러서 스르륵 풀리어, 쥐고 있던 지난날의 빛바랜 권력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권력과 투쟁이 끝난 후의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로 후에는 두고두고 기억되겠지만, 문제는 그 자리에 남는 것이 빈 공간이 아니라 잔해라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정기가 담긴 성벽 같은, 죽은 것이 박제된 박물관 전시물 같은 잔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야속한 기억, 그들의 배신당한 꿈과 탓할 대상을 잃은 상처들. 이런 문제들은 감성적 언어로 다가오지만 여파는 더없이 현실적이다.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은 진화와 변모가 뒤따른다는 말이고, 결과는 환경적 여건에 의해 매 순간 결정된다. 환경적 변수에 대한 개입의 시도, 즉 정부 정책 같은 직무가 사실 살 떨리는 일인 이유다. 그렇다고 입술만 깨물고 있을 수는 없으니 보통 일이 아니고 한 인물이 오로이 감내할 수 있는 역사적 사명도 아니다.


감성은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고 삶을 윤택하게 해 주지만, 감성을 감성답게 보존하고 보필하기 위해서 필수로 적절한 TPO가 존재한다. 한국의 상황에 위와 같은 감성을 사용한다면 부적절할 것이다. 어느 정권의 태세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위급한 상황에는 결단력이 왕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위급한 순간에 감성을 내세우면 감성의 빛과 가치가 한없이 퇘색한다. 


독일의 경우 통일에 대한 감성이란 혼란의 원인을 잊지 않기 위해 도움이 된다. 통일의 시점 이후의 일들과 현재의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오늘의 기사를 가져온다. 저자는 동독 출신이며 동독에 대한 기사로 2019년 올해의 문화 시사 기자로 뽑혔다고 한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동독인 여성으로서 또다시 서독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설명하고 있다. 사실은 이걸 그만두고 싶었다. 너무나 귀찮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동독 기자 동료들은 몇 년째 이걸 시도해왔다.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차라리 내 쪽의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쓴다. 서독이 자신을 감싸기 위해 두른 장벽은 두껍고 매우 높기 때문이다. 동독에 대한 모든 언사와 고민은 장벽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서독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자기 자신이다. 독일 전국적 소양이란 동독이 혼자 지닌 것 같다. 


내가 이러는 것도 상황이 너무 위급해서이다. 지난주에 튀링겐 주에서 자유주의 의원이 수상으로 선출됐는데 문제는 극우정당의 투표가 한몫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독일은 분노로 떨고 있다. 그렇게 놀랄 전개는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눈 깜짝할 새에 지방의 위기가 전국의 위기로 변했다. 이제는 기민당 대표가 대표직을 내려놓기로 선언했고, 앞으로 며칠 및 몇 주간 무슨 일이 추가적으로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대연정은 이 혼돈에서 살아남을 것이며, 튀링겐 주는 곧 다시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평화를 되찾을까? 


또다시 동독이 국가를 이리저리 내모는 중이다. 2015년부터 그랬다. 극우 풀뿌리, 극우 정당, 2018년에 극우 성격의 혐오 폭동, 2019년에 유대교당 테러 미수, 그리고 최근에 동독의 삭센-안할트 주의 사민당 의원이자 유색인 이민자인 디아비 박사 사무실의 테러. 도대체 어떤 일이 더 벌어져야 서독이 결단력의 필요성을 깨달을까? 동독은, 동독과의 사이는 계속 이대로 일 수 없다. 이 말도 무릇 천 번은 족히 쓴 듯하다. 


즉, 서독은 동독을 더 보살펴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살핌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초래한다. 위에서 아래로, 교감처럼, 가부장적인 뜻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 상관없다. 자신의 이익이 또다시 우선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결정권자들이 서독 출신이고 그들은 동독을 어젠다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지나쳐버린 개혁이 산을 이룬다. 환경문제를 논의한 지금, 동독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동독 전문 정책가 대신 청사를 만들어서 예산, 권력, 인사권을 가지고 동독을 전면으로 케어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낡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새로운 제안을 건네겠다. 동독에게 잘해주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동독은 혼자 내버려두어도 어떻게든 살 것이다. 오히려 서독이 자신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래야 미래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을 보필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서독은 민주주의적으로 돌아가는 동독이 필요하다. 툭하면 흔들리고 개판을 벌리는 소수도, 급진적인 떨거지도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우리 동독은 서독을 앞으로 수십 년간 아주 집요하게 괴롭히게 될 것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결과 아닐까? 


어젠다라는 건 덕담도, 감성적 겉치레도, 주문처럼 외우는 슬로건도 아니다. 좋은 말로 해결될 시점은 30년 후인 지금에 유통기한을 지나도 단단히 지났다. 내가 말하는 건 행동이다. 사실 요지는 다름 아니라 통일 후에 형성된 현실을 근본적으로 갈아엎고 교정하는 것이다. 동독 건설 2.0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실패의 쓴맛이 강하게 돌아온다. 그러니 새로운 이름과 개념도 당연히 필요하다. 


서독인들은 대부분 듣기 싫어한 말일 것이 당연하다. 또다시 동독에 돈을 퍼주자고? 이미 갖다 부은 돈이 얼만데! 동독 수도의 중앙 기차역이 서독 기차역보다 훨씬 아름답게 수리됐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입꼬리가 구겨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맞다, 통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삼켜버렸다. 하지만 돈의 대부분은 어떻게든 다시 서독으로 흘러 들어갔다. 과학자들은 결국 양쪽의 이득은 같다고 한다. 동독의 대부분의 대기업은 서독의 소유이고, 가치 있는 부동산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동독의 재건은 서독 기업들이 시행했고, 기업의 지도부는 상상 이상으로 서독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30년 전부터 젊고, 똑똑하고, 건실한 자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간다. 여성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몇 대도시를 제외한 동독은 우울하고, 노쇠하고, 가난하며, 남성이 주도적인 전경으로 변해간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1989년 이후 서독의 하층민은 동독인이 채웠고, 동독의 상류층은 서독인이 채웠다. 


치명적인 발전인데 이미 한순간에 사회적 불균형이 초래됐고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정의 시도를 거치지 않았다. 2015년 이후 극우정당의 승리로 가시화된 정치적 불균형은 정확한 현황이 육안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다. 극우정당은 이런 문제 따위는 관심도 없고 이용해서 이득을 취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책임도 있는 것이, 오늘까지 고고한 연설과 민주주의적 양심을 향한 도덕적 호소 이상의 반응을 취한 적이 전무하다. 


이러한 호소와 시민사회의 활동이 중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 할 것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안정을 얻는 것은 고소득자의 양심과, 대도시 주민들과, 지식인 중산층 사람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밤에 발 뻗고 태평하게 잘 수 있는 것 외의 성취는 없다! 


고로 요지는 독일인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다: 소득 재분배를 위한 급진적이고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조치들. 예를 들어 동독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지도부에 종사하는 동독인을 위한 쿼터를 도입하여 동독 지방에 대한 결정을 직접 하게 해 주어라. 


동독인도 드디어 부를 형성할 수 있는 조치를 생각해내라.


남녀가 가족에 기여하는 소득이 동일할 때 세금을 면제해라. 서독에 비해 동독에서는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동독의 미래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유치해라.


상속세를 올려라. 동독에는 상속자가 고소득자만큼이나 적기 때문이다. 


참의원 같은 기관에서 소수를 위한 규정을 개발해라. 정치적 표결 시에 동독은 다수결을 이루기 어려워서 항상 진다. 


이 외의 아주 실질적으로 동독을 위한 해결책을 논의하자. 사회를 관통한 아이디어 대회를 열자. 동독인 자신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정책 제안서보다는 에세이로 읽는 것이 어울리는 기사다. 서독의 입장에서 반발이 본능처럼 솟구칠 수 밖에 없는 제안들이다. 목표 달성에 좋은 제안들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모호하다. 정책 전문가가 쓴 글이 아니라 통일에 관련한 동서독 정서 전문가의 기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의 자원을 투자했음에도 결핍은 셀 수 없다는 주관적 서술형 진단서로 읽어야 할 것이다.


사상의 측면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가난과 결핍이 사상의 오류로 이어질 수 있지만 현재 문제시되는 사상의 뿌리가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했는지 짚어야 그릇된 사상에 돈까지 주입하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독일 통일 즉 장벽의 허묾 그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럽고 벅찬 사건임이 맞다. 현실로도, 메타포로서도 그렇게 절묘한 사건은 역사에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 전과, 그 후의 사건들은 삭막한 현실 그 자체라서 순식간에  인간의 본성과 시장의 법칙이 지배권을 가로채서 창궐할 것이다. 그런 후에 인간 사회의 황량함을 에너지원으로 집어삼키는 정치의 아우성이 쑥대밭을 만들 것이다. 적어도 독일의 경우는 그랬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평온해 보이고, 실제로 내란이라던지 무정부에 가까운 파국이 임박하는 상태는 아니지만, 민주주의적 자긍심이 강하고 전후 참회 문화의 도덕적 집중훈련으로 무장된 지식인들이 이끄는 현대의 독일은, 이 정도만 가지고도 길이길이 남을 충격을 먹은 듯하다. 


어쩌면 통일된 "아우"의 돌발행위와 그의 뼈아프고 부끄러운 방황은 이제껏 외면해온 뒷방 문제를 직면하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여기는 것이 건설적인 접근일 테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형제들"을 도울 것인가? 동독 "아우"이자 맹목적 "을"을 향한 미움과 실망이 극에 달한 지금, 어떻게 그들을 도울 지지를 창출할 것인가? 여기서 정치의 기적적 묘수가 짠 하고 등장하면 좋으련만, 없는 데서 갑자기 생길 리 없다. 


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통일은 파괴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이전의 정권은 허물어지고 기존의 생태계는 장기적으로 와해되었다. 하지만 파괴는 좋은 면도 있어서, 부정적인 것의 파괴는 긍정적이다. 통일의 실체는 이렇듯 중의적이어서 빛과 그림자의 명암을 통일 전에서부터 확고하게 명명해야 한다. 모두에게 밝은 미래를 위해.


이전 04화 독일은 왜 전후 책임을 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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