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게는 혐오를 키우는 능력이 있다. 좋은 것을 나누고 부풀리는 것이 가능하듯 그 반대도 가능한데 독일이라는 사회 국가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이미 혐오의 상상 초월적 차원을 몸소 실행해 보인 적이 있고 그게 2차 세계대전과 그중의 만행이다. 그만큼 전후에는 서서히, 늦게나마 몸과 영혼의 의식을 치르듯이 옛 죄를 하얀 재로 태우고 나서 항상 몸 앞에 지니고 다니는 국가가 독일이다. 좀 드라마틱한 묘사인데 그만큼 극적인 사안이니 이렇게 표현해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를 위해 문학이 존재하니까.
혐오에 대해 그러면 도가 텄겠구나!라고 희망적 짐작이 가능할 텐데 애석하게도 세상 이치가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독일 사회는 한편으로는 선을 긋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 너머에 엉뚱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뒤떨어져 있다. 일반적인 분석으로는 현재 독일 내 극우 정당의 비상의 주요 원인으로 동서독 통일의 후유증을 꼽는다. 그 외에도 세계화에 대한 두려움과 외부 세력의 침투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동독은 장벽을 허문 통일은 쟁취하였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야말로 덩그러니 절단되어 나뒹굴었나 보다. 통일에 대한 동독과 동독인의 시야와 결과는 앞으로도 서서히 더 다루겠다.
그래서 현재 독일 사회와 정치에는 하나의 분열이 아닌 분열이 분열을 낳았다. 우선 정치문화적 특혜를 누리는 격차의 선을 그대로 본 딴 분열이 있다. 그리고 서로 간의 혐오가 있다. 낙심한 자들과 성난 자들을 조정하는 자들은 혐오를 자양분 삼아 성장하고, 역으로 리버럴하고 자칭 깨어있는 시민들은 그들을 혐오한다. 이 상황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 결국 기존보다 배로 혐오된다. 총체적 난국이고 혐오의 사이클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러니한 것이, 자칭 지식인과 진보적, 자유적 인사들은 극우세력을 공개적으로 혐오하고 반대하고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징과도 같고 끔찍한 과거의 망령에 대고 명백한 NO! 를 외치는 것과 같아서 그렇다. 좀 더 기능적으로 표현하면 사회가 전반적으로 극우세력이라고 명명하는 정당을 허하거나 가까이하는 기조라도 포착될지면 민주주의적 정당 자체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유권자들은 등을 돌리고 신뢰와 철학의 실추는 참담할 것이다. 이 상황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것 같다.
독일의 보수는 현재 큰 위기다. 사민당은 거의 회복 불가이지만 기민당은 본인의 살점을 도려내어 극우세력에 뺏긴 꼴이 됐다. 이전에는 다양한 보수를 총괄하는 정당이었다면 이제는 지지자와 사상의 일부분을 납치당한 후 유린당한 셈이다. 내가 더 어릴 때만 해도 기민당의 이미지는 이민자인 나로서 다소 가까이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다. 반겨지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그들만의 집단의 느낌이 강했다. 문화, 사상적으로 단일적 경향이 강해서 그렇다. 그러다가 내 젊은 시절의 총리인 메르켈이 정권을 쥔 뒤로 서서히 이미지가 바뀐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특히 말년에 난민을 유럽에 받아들이는 포문을 여는 등 다소 충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로서 독일의 좌부터 우까지 사방면에서 오만가지 이유로 비판을 빗발처럼 쏘았고 그녀에 대한 후대의 평판도 이로서 영원히 달라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기민당을 친근하게 만들어주고, 보수 정치의 공감지대를 열고, 마지막에는 기독교 정신을 어찌나 급진적으로 실현했는지 거의 반골 정신에 가까운 순간을 보여줘서 의외성으로 치면 일인자인 정치인이다. 나는 의외성을 좋아한다. 원칙적이자 냉철한 사람의 결정적 찰나의 인간적 면모의 발현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극우정당의 극성 때문에, 말했듯이 세기의 시선은 혹독하고 혹독할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와 시간은, 좀 더 흐르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나는 독일과 그녀에게 건승을 빈다. 독일이 하도 분열돼서 누구에게 어떤 건승을 빌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오늘의 기사는 역사학자와의 인터뷰인데 (자유롭게 추렸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현재 상황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독일의 평균적 지식인의 생각과 관습까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와는 또 다른 부류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정신적으로 거기에 끼려 하지 않는다. 참 아이러니다. 극우정당이 활용하는 혐오의 대상으로서 내가 오히려 더 가까운데, 극우정당을 따르게 되는 유권자들의 입장에 대해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려 하고,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사람도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같은 조건에서 백인인 독일인이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선을 그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인처럼 생긴 독일인이 아니어서 생각의 일탈을 얻는다. 생각의 자율성을 가장 높이 치는 나에게는 특별하고 중대한 특권이다. 각설하고 들어가자.
Q: 위르싱 교수님, 백 년이 지난 지금 1920년대는 아직 지대한 매력을 풍기는데 왜 그런가요?
A: 바이마르 공화국은 첫 독일 민주주이기도 했지만 문화적으로도 유일했어요. 예술적 실험 정신과, 발상과 표현의 풍부함이 독일과 유럽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했어요.
Q: (*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최근의) 독일의 인기 드라마 "바빌론 베를린"은 오히려 어둡고 위험한 것의 유혹을 주제로 했어요.
A: 유혹과 병약함이 섞인 이 시대의 다양성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죠. 시대정신의 건설과 문화적 현대성 서의 정체성 탐구에 현재도 방황 중인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내요. 다수의 불확실성을 내포한 우리의 현재는 20년대에 반영돼요.
Q: 연관 있는 두 시대인가요?
A: 유사성은 있죠. 하지만 이런 비교에서 일반화시킬 순 없지요, 그렇게 단순하진 않죠.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아요.
Q: 오늘날 "바이마르 같은 상황"이라고 일컫는 건 주로 공화국의 몰락을 말할 때죠.
A: 학계의 관점으로는 바이마르를 1933년 상황에서 분석하는 걸 그만둔 지 오래예요. 하지만 요즘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얘기가 많아서 그토록 부정적인 시야가 되살아나고 있죠. 그럴 때 바이마르와 공화국의 자발적 파괴를 연상하는 건 독일의 반사 본능이에요.
Q: 그렇게 하는 건 공화국에게 정당하지 않나요?
A: 그 역사를 축소하고 곡해하는 것이죠. 공화국의 몰락만을 바라본다면요. 민주주의의 미래는 섣불리 정해지지 않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처음부터 몰락을 향해 달려간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정치가 항시 위기상황이 아니었던 것처럼 문화도 현대적이고 전위적이기만 한 게 아니었어요. 제국의 대물림으로 인해 사회와 문화가 깊게 분열되어 있었어요. 1차 대전의 트라우마와 실패가 분열을 극화했고 손가락질할 대상을 찾는 도덕적 분노가 있었죠. 바이마르에게 큰 짐이던.
Q: "황금의 20년대"와 "바이마르 같은 상황"이 동시대인데도 아직까지 이렇게 다른 시대의 독일 역사인 것 같죠?
A: 착시라고 할 수 있어요. 전위적이던 바이마르 문화는 문화역사에 정말 큰 의미죠. 브레히트의 연극, 되블린의 소설, 재즈, 바우하우스 같은 것들을 따로 바라보는 걸 익히고 상대적으로 우울하던 정치에 대비하죠. 이렇게 기억의 이상한 이분법이 생겨서 바이마르 문화의 분열을 망각해요.
Q: 그때는 사회가 극적으로 변했어요. 가치의 변화는 국가 유형도, 젠더 이슈도 건드렸죠. 20년대를 보면 사회가 수용 가능한 변화는 얼마인지, 어디부터 과부하가 걸리는지 배울 수 있나요?
A: 그것까지는 아니에요. 개혁 중의 사회민주주의를 봐요. 노동과 질서 같은 전통적 가치로 빠르게 회귀했죠. 가치의 변화는 특히 1923년에 하이퍼 인플레 중에 임박했어요. 어제 유효하던 게 갑자기 가치를 잃으니, 저축하거나 노후를 준비하거나 자녀를 돌보는 사람은 하루아침 사이에 실패자로 탈바꿈당했죠. 열심히 일하기로 알려진 수공업자가 갑자기 망하기 직전인 반면에, 투기하거나 사기를 치는 나쁜 놈은 동화 같은 부를 손에 넣었죠. 이런 경험은 트라우마와도 같은 결과를 낳았어요.
Q: 빠른 변화와 국제적 영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과거, 국가주의, 민족주의로 도피하죠. 20년대가 현재와 그래도 좀 유사하지 않나요?
A: 그런 측면에서는 그렇죠. 역사에서 사람들은 꾸준히 국제적 세력을 마주하고 본인의 기반이 위협된다고 느껴요. 1차 대전 후에는 국제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및 공산주의가 있었고 동시에 "국제적 금융 자본"인 전 세계로 얽힌 기업과 은행도 있었어요. "미국"이란 재즈처럼 증오하는 문화 유행의 동의어였고요. 현재에는 세계화로 인해 팽창하는 세상에 대한 의심이 하나로 뭉쳐져요.
Q: 얼마 전 보수정당 수장인 도브린트가 "보수적 개혁"을 선언했는데 이것도 20년대를 연상해요.
A: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지 모르겠어요. 바이마르의 보수 개혁은 전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이었고 나치의 주요 무기 중 하나였어요. 20년대의 사상적 부활은 오늘날 존재하는 극우정당들과 풀뿌리 운동들이에요. 백 년이 더 된 민족적 사상의 씨앗이 피어나는 거죠.
Q: 전쟁, 전패, 개혁, 베르사유, 정치 폭력, 경제 위기처럼 바이마르가 짊어야 했던 유산이 오늘과 비교될 수 있나요?
A: 위기의 압력이 그때가 훨씬 심했죠. 제국 때에 벌써 많은 압박이 있었어요. 산업화, 국가의 탄생, 헌법의 문제. 이어서 1차 대전과 그에 따른 배척, 그리고 당연히 많은 사상자. 독일인은 전패를 소화하고 하이퍼 인플레와 세계 불황 위기를 감내해야 했어요. 아마 역사적으로도 극한이어서 실존적 부담의 농축으로 치면 아마 유일할 거예요.
Q: 1989년 통일 후에 전 동독이 비산업화됐어요. 많은 동독인이 실업을 당하고 새로 시작해야 했어요. 오늘과 비교할 만한 변혁인가요?
A: 20년대-30년대의 물질적 빈곤이 훨씬 컸죠. 하지만 낭패와 손실의 경험은 비교할 만하죠. 여느 동독인은 독일 민주 공화국의 끝을 낭패로 받아들였어요. 그들의 정체성이 우스워졌고 실업과 함께 삶의 터전이 사라졌어요. 게다가 통일이 깨운 높은 기대까지 있었죠. 그런 건 20년대가 연상되기는 해요. 1차 대전과 혁명 후에도 많은 희망이 깨졌죠. 1919년에 독일 철강 연합이 기사를 내서 "실망의 한 해"였다고 했죠. 결국 바이마르의 심리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건 1990년 이후 동독 사회에도 적용돼요.
Q: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늘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비교하면 불안한가요, 안심되나요?
A: 저도 그게 궁금해요. 차이를 강조할 것 같아요. 크게 두 가지인데, 한쪽에는 전통 그 자체가 있어요. 독일의 민주주의 역사는 이제 70년이 넘어요. 여러 세대를 지나서 사용법을 배웠고 대안적 체제 따위는 이제 거의 상상도 안 해요. 바이마르는 달랐어요. 14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아서 가끔 힘겨운 정치적 의사형성, 정당, 연정, 의회 제도에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했어요.
Q: 두 번째 희망은요?
A: 정치, 문화, 경제의 엘리트들은 오늘날 거의 대부분 민주주의 신봉자들이죠. 바이마르 공화국은 안 그랬죠. 국가를 향한 높은 충성과 책임감은 있었어도 민주주의적 헌법을 향하진 않았어요.
Q: 5-10년 전에는 안심되는 차이를 더 많이 보여주셨을까요?
A: 질문에 더 긍정적으로 답했을 건 확실해요. 20세기의 정치적 급진주의는 오래부터 제 연구 분야예요. 항상 변함없이 민주주의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었죠.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보기 싫은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났죠. 바이마르에서 알던 혐오 프로파간다가 돌아왔어요. "민족적 배신자"라는 욕을 공공연하게 다시 듣게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Q: 바이마르에 나치스 정당의 비상 이전에 전통적 정당 체제가 와해됐죠. 오늘날 대중 정당이 흔들리는 것이 얼마나 우려스럽나요?
A: 가장 큰 걱정이에요. AfD(*현 제일 막강한 극우정당)의 국회 12% 입성은 참을 만해요. 하지만 바이마르 식 복수 정당제를 위한 준비는 안 됐어요. 아직도 기민당이나 사민당이 절대 다수결을 얻을 거라 기대하는 사람이 많아요. 몇십 년 간 그게 중심이었죠. 그게 이제는 없고 다시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Q: 사민당은 바이마르에서도 파멸에 가깝게 패했지만 존재 자체를 의심받지는 않았어요. 오늘 정당들은 그때보다 힘든가요?
A: 사민당이 이토록 초라해질 줄은 저도 몇 년 전만 해도 짐작치 못했어요. 독일 정당 체제에게는 극적이죠. 바이마르에서는 자유적이고 보수적인 기동들이 모두 부러졌어요. 오늘 비슷한 상황을 겪어요. 보수주의는 분열되고 극우정당은 꽤 굳건해졌죠.
Q: AfD(현 제일 막강한 극우정당)은 자주 NSDAP(*과거 나치 정당)과 비교돼요. 나치를 너무 귀엽게 보는 거 아닌가요?
A: 급진적 민족주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가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이상, AfD는 "히틀러 정당"은 아니에요. 오히려 유사성은 유권자에서 보여요. NSDAP의 지지자 또한 다 죽여버리고 보자는 뼛속까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절망이 메시아적인 구원의 필요와 결합되는 거예요.
Q: 바이마르는 14년 후에 종결됐어요.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기인지 더 오래됐지 않나요?
A: 민주주의에 사는 동안 항상 긍정적, 부정적 시야가 모두 가능해요. 민주주의는 우리의 이상향에서 항상 다르기 때문에 위기는 항시 포함이에요. 하지만 장기적 동향은 있어요. 개인주의 같은 것은 기존 유권자 집단을 풀어헤치고 대의 민주주의를 적대하게 해요. 개인화된 인간은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보는데, 아주 특정하게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대의 민주주의를 오해한 거예요. 이래서 정치 수임자 및 위탁자들에 대한 불만이 깊게 뿌리내리고, 역으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자꾸 안정 장치를 심으려 해요. 결국에는 이로 인해 정치는 손발이 묶여요. 그게 현재 사민당의 비극이에요.
Q: 사민당이 앞으로 야당의 역할을 통해 고침 받고자 한다면 1930년과의 비교가 너무 뻔해져요. 그들이 그때 대연정을 폭파한 것이 바이마르 의회주의를 돌아오지 못할 먼길로 이끌었죠.
A: 오늘의 의회는 그만큼 쉽게 무력화되지 않죠. 독일 기본법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바이마르 헌법에서 교훈을 얻었고, 그건 바로 민주주의의 형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끝났다는 거예요.정치 정파들의 오늘날의 책임은 오히려 재투표를 가능케하는 것이 아닐까 해요. 대연정은 의회주의에서 반체제적에 가까워서, 좌-우 간의 필요한 공간감을 억제하고 양쪽 끝이 커지게 해요.
Q: 바이마르는 위기 사회로 기억돼요. 오늘도 "위기론"이 한창이고 어디든 위기상황인 느낌이네요. 정상화를 향한 그리움도 두 시대 간의 평행선인가요?
A: (*오스트리아 소설가) 슈테판 쯔바이그가 20년대에 대해 말했어요. "세상이 숨을 참던 한 찰나에 그토록 고난을 겪던 우리 세대가 평범함으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깊은 그리움이 호되게 배신되던 얘기죠. 그의 세대는 1924년과 1928년 사이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정상화에 대한 희망을 한 가닥 잡았어요. 정기적 소득, 상대적 안전, 어쩌면 가족을 이루고 삶을 즐길 만한 기회. 바이마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조차 사치였죠. 현재에는 전혀 그렇지는 않잖아요. 이런 소원들은 오늘 거의 정상입니다.
독일의 지식인 사회가, 그리고 일명 부르주아 계층 및 리버럴 한 사회가 얼마나 본능적으로 나치를 싫어하는지 (사실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얼마나 본인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인데, 인터뷰에 응한 역사학자도 학자로서 통상적인 태세를 취하기도 하거니와 인터뷰를 실행하는 기자도 뭔가 작정하고 임한 것 같다. 그만큼 우려가 깊다는 뜻도 되지만 사회적 의무감 또한 한 역할을 하는 듯하다. 독일의 민주주의 문화는 이렇게 결집된 가치 단체에 의해 견인되고 그들은 당연히 사회, 문화, 언론의 중요한 보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러면 언저리의 그늘진 곳의 그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들의 반란이 이유가 없는 반란인가? 사회적으로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당연한 행동의 역효과는 무엇일까? 혐오는 나쁘지만 평범한 이웃을 미워할 순 없다. 우리도 모르게 이웃을 미워하지는 않았을까. 사회적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이웃을 미워하는 것을 부추기지는 않았을까. 정치인들은 오늘도 의문의 1패를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