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과 코로나 경고 앱 이야기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KAL 비행기 추락의 원인에 관한 이야기로 경영서적에 자주 등장한다. 한국인 기장들 사이에서 존댓말과 경어를 하는 문화가 위기에 대한 돌발 대응 능력을 방해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그 이후로 문화를 바꿨다는 교훈을 전달하는, 그런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서의 높임말은 문화이자 원칙이다. 누가 잘못을 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지적한다면, 내 말의 진의 여부와 상관없이 윗사람에게 말을 버릇없이 했다는 이유로 사방의 비난이 나에게 쏠린다 (네, 경험담이다). 참 거추장스러운 문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요하고 소중한 문화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한국 식으로 사회적 위계에 따른 극존칭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대신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고) 윗사람이 챙겨주는 문화도 없고 그냥 각자도생이다. 한국의 "꼰대" 문화는 나도 싫고 너도 싫어한다만, 그 이면에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받는 혜택이 많지 않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려면 사실, "꼰대" 같은 두리뭉실한 단어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자립적 사고를 마비하는 효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김영하 소설가가 어디 방송에 나와서 "짜증 난다"라는 표현을 학생들에게 금지시켰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약간 다른 예로 돌아와 보자. 한국에서의 코로나 경보 시스템을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모든 핸드폰의 경보음이 울린다는 식의 일화만 전해 들었을 뿐. 하지만 독일을 포함한 외국에서는 몇 달째 뜨거운 논쟁이 코로나 경고 앱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독일은 개인정보 보호를 끔찍이 강조하는 문화가 있다. 물론 이런 복잡한 주제에 신경을 끄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만큼 특정 집단인 소수는 강하게 주장하기 마련이다. 같은 맥락에서, 동독의 뿌리 깊던 감시 역사 때문인지 국가로 인한 감시에 매우, 엄청 예민하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 경고 앱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혹은 사용하되 온갖 제약을 걸어야 한다는 원칙주의가 나에게 매우 신기하게 다가온다. 신기한 이유는, 코로나처럼 지상 최대로 급박한 사건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앞세운다는 사실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무너질 거라면 애초에 원칙이 아니다.
한국도 인터넷 법률 등의 분야의 전문가들, 혹은 일부 미디어에서는 경각심의 소리를 내고 있다. 코로나 앱은 개인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코로나 예방이라는 대의 아래 개인 정보를 추적하고 사용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맹점이 많다. 하지만, 동의를 거치고 모든 법적 및 사회적 효과를 따지다 보면 지금 독일처럼 오늘 (6월 16일) 코로나 앱을 출시하게 된다. 경보 장치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대부분의 기능은 없앤 채로 말이다. 한국과 독일의 대응 중 절대 어느 쪽이 낫다는 평가는 아니다. 다만 서로 반대되는 길을 간 사례가 나와 이렇게 가까이 있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다루는 것이다. 게다가 내 입장에서는 양쪽이 일리가 있다. 어느 정도는 국민과 정서의 압박에 대한 거울이지도 않을까 싶다.
가령 독일이 위와 같은 우려사항보다 위기를 우선시했다면, 지금처럼 원칙주의적 이미지는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선택은 득과 실이 있고, 그 선택이 수십 세기를 걸쳐서 모아진다면 정치 문화와 시민 의식이 된다. 독일에서는 빵이 주식이 되고 한국에서는 쌀이 주식이 되듯이, 각자의 발전 양상에 절대 위아래는 없다.
오늘의 기사는 독일이 코로나 경고 앱을 향해 내세우는 원칙주의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했다. 아래에 발췌, 번역하겠다. 출처는 슈피겔 주간지.
보건부 장관은 요즘 모두의 기대를 낮추려고 애쓰는 중이다. 리스크가 큰 과제일수록 손실을 조심하기 위해서이다. 본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독일에서 이제 개시될 코로나 경보 앱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그는 거듭 말한다. 앞으로 몇 주간 수백만 명의 국민만이 앱을 사용해도 성공이라고 한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40%의 독일 국민이 앱을 사용할 의향을 밝혔다.
프랑스의 전용 코로나 경보 앱은 지난주 개시 후 4일이 지나자 벌써 백만 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독일 정부의 산하 조직들은 현재 비슷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 거대 홍보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앱을 내려받으라는 광고를 꽤나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결정적인 질문은 앱이 과연 원하는 대로 작동할지이다. 확진 가능성을 제대로 측정하고 접촉자들에게 빠르게 소식을 알려서 연쇄 확진을 막을지. 간격 측정 기술은 블루투스 기반이라 매우 불 정확하다. 측정 오류가 많아질수록 앱의 신뢰는 떨어지고 현재 과부하에 시달리는 보건 시설들을 괴롭게 할 것이다. 앱의 효력은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앱은 그러니까 실험이다. 실전 실험.
또한 사용자의 올바른 작동에 많은 것이 달린다. 확진이 확인되면 보고를 해야 하고, 경보를 받으면 올바르게 반응하며 검사를 받아야 한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한다. 국가에 대한 신뢰와 질병본부에 대한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앱의 남용을 처벌하는 법률은 입법하지 않기로 보건부 장관과 정부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앱은 자율적으로 사용하고 이미 충분한 관련 법률이 적용된다는 이유로. 과연 그럴까? 팬데믹의 시대에서 참여를 강요하는 사회적 압박이 생겨나지 않을까? 고용주는 직원에게 앱을 사용하라고 강요할 수도 있겠다. 명확한 기한을 정하는 법률이 있다면 이런 걱정이 덜할 거이다. 스위스의 경우에는 이미 이런 법을 국회에서 요구했다.
코로나 경보 앱을 내려받아야 할까?
아마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연 확진 제지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사용자의 피해는 적은 것에 비해서 사회적 이득에 기여할 가능성은 크다.
독일의 코로나 경보 앱은 사용자 개인 정보와 위치를 저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동 동선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프로그래밍 코드는 오픈되어서 수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감수되었다. 앱에게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배운 것도 있다. 최우선 국무를 실행할 때조차도 정부가 얼마나 보건 인프라와 구글, 애플과 같은 기업에 의존해야만 하는지. 이 기업들은 스마트폰 운영 체제를 주도하기 때문에 아무리 국가의 앱이라고 해도 피해 갈 수 없다. 기술 대기업들은 정부조차 따라야 하는 규율을 정하는 갑이다. 국가 당 하나의 추적 앱만을 허용하고, 앱 스토어의 순위 선정을 통해서 앱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사용자들의 신호를 접수하는 주기까지 이 미국 대기업들이 정한다. 기기들의 배터리 사용률을 줄이기 위함이다. 반면 많은 독일 개발자들은 신호 접수 주기를 더 짧게 잡아서 간격 측정을 개선하기 원했다. 실리콘 밸리가 허락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디지털 장관은 애플과 대결했다가 완전히 패해버렸다. 프랑스의 코로나 경보 앱은 개인 정보를 모두 한 곳에 저장한다. 그래서 아이폰의 경우 일상생활에 활용하기 어렵다고 본다. 프랑스 정부는 애플에게 수정을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자신의 무능함을 목격한 프랑스는 상처를 받았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유럽연합의 디지털 장관 다섯 명이 함께 입장문을 선언했다. 유럽은 글로벌 기술 대기업들과의 관계를 새로 조정해야 한다는 선언문이다. 대기업들이 디지털 기준의 개발에 참여해며 모든 국가들의 안녕과 개별적 필요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결국, 독일의 앱은 초기의 발상과는 좀 다르게 나왔다. 전 유럽에 적용되지 않아서 국경에서 작동이 끝난다. 이걸 개발하려면 또 몇 주가 걸린다. 어쩌면 코로나의 두 번째 물결이 닥치는 때가 되어서야 독일의 코로나 경보 앱이 빛이 발할지도 모른다.
앱을 개발한 텔레콤과 SAP는 개발 코드를 github에서 공개해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국가 과제 치고는 유달리 투명해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원금에 대해서는 덜 투명했다. 독일 정부는 위급함 때문에 과제를 공모전 없이 지정했다. 개발이 시작된 몇 주 후에도 아직 계약서조차 없었다. 책임자들은 아주 최근에야 금액을 공개했다. 개발비용만 해도 2천만 유로, 운영비는 약 3백만 유로로 측정된다.
어쨌든, 디지털 사회가 심화되는 현상이 전 지구 공통점임은 확실하다. 그동안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인식과 안전장치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가는 상황을 살아왔다. 하마터면 적응할 뻔했다. 댓글부대나 악플 과열 사건들만이 다시금 경각심을 일깨울 뿐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계기이자 기회이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디지털 사회와 우리의 삶이 점점 더 하나로 녹아드는 시점에서 갑자기 코로나라는 아우토반을 타게 되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우려들이다.
원칙주의는 생명을 위협한다? 분명히 그럴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칙주의가 생명을 구하는 예시도 그에 못지않게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