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nzlerin May 30. 2020

독일의 영재교육은 뛰어날까?

한국에서 왜 노벨상이 안 나오는지에 대한 담론과는 전혀 다른 결론일지도

한국만큼 영재라는 단어를 자주 보고 들은 곳은 없다. TV에는 영재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과 각종 특화 학교, 심지어 학원들도 영재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원조"나 "고품격" 처럼 단어의 원래 의미에 물을 많이 부어서 희석된 느낌이다. 영재로 키우고픈 바람과, 실제 영재라면 최선으로 지지해주고픈 사랑이 혼합돼있다. 내가 교육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영재로 키우는 것이 가능한지, 무슨 의미인지,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모두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모두가 영재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재라는 단어의 인플레가 그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렇게 해서 영재의 과학적 정의가 희미해지면 문제가 생긴다. 특정한 아이를 특정하게 도우는 방법들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문마다 맞는 열쇠가 있듯이, 특정한 문에 맞는 열쇠들을 누군가는 연구했을텐데, 틀린 열쇠로 자꾸 문을 열으려 한다면 아이와 학부모 모두에게 고통이 예상된다.


독일과 비교하자면, 여기서 영재라는 말은 거의 못 들었다. 그나마 인터넷이나 책을 뒤지면 자료가 찔끔찔끔 나온다. 영재 특화 학교도 여기저기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26곳이 검색되는데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 그리고 한국보다는 전국에 교육 핫스팟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니, 쏠림 현상이나 과열 분위기도 비교적 덜할 것 같다.


그래서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독일에는 영재라는 개념이 생소하다. 어쩌면 그래서 영재로 살기에 더 척박한 곳이다. 사람은 주변에 영감을 주는 예시가 없으면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초대 여성 대통령이나 미국 법학대학원의 초대 한국인 교수, 등등의 예시들이 희망을 주는 이유다. 가능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힘들고, 내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전에는 확신하기 힘들다. 그래서 독일에서 영재란 오랜 기간 자신이 이상하다는 의심을 떨쳐내야 하는 여정일 것이다. 그 여정을 끝내는 것은 심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고안하낸 지표가 주는 "제도적 안심 조치"일수도 있고, 더 넓은 세계에서 부딪혀보고 나서야 찾아내는 지평 위 두 발의 위치일수도 있고, 인생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포괄적 시야일수도 있다. 성공할 잠재력이 높은 만큼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는 이중 위험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인생이든 안 그럴까. 그리고 성공과 실패는 누가 정의하는 것일까. 쉽게 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나도 궁금한 것은, 독일의 척박한 영재 교육, 영재 양육 문화, 영재의 사회적 인식에도 불과하고 왜 노벨상이 나오냐는 것이다. 노벨상을 성공의 어떤 척도로 여기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연구는 올림픽이 아니다. 올림픽만 해도, 어떤 종목에 어떤 나라가 왜, 언제 부상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요인들이 존재하는데, 연구는 더하면 더했지다.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영재 특화 교육이 왕성하다고 노벨상이 나오지는 않는다. (한국)

영재 특화 교육이 척박하다고 노벨상이 안 나오지는 않는다. (독일)

이렇게 써보니 논리적 체계 같아 보이는데 그런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질문만 더 많아진다. 영재 교육 활성화에 내제된 의도들이 혹시 노벨상의 의도들과 반대 선상에 있는 것인지, 이 정도로 질문을 줄일 수 있겠다.  


또 하나 확실한 건, 학부모들 고생이 많다.


오늘은 독일에서 영재로 태어나면 겪는 어려움을 다룬, 독일 주간지 슈피겔(Spiegel) 기사를 번역했다. 한국에서 왜 노벨상이 안 나오는지에 대한 인터넷 여론을 보면, 주로 비슷한 의견들이 보인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해외에서는 영재가 자유롭게 발달하도록 존중하고 지원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모르겠다, 어쩌면 미국에서는 그럴지도. 독일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 말보다 아래의 생생한 경험담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줄 것이다.


우리 4살 반 짜리 딸의 아이큐가 151이라서 영재라고 심리상담사가 우리에게 통보하자, 나는 "세상에 젠장!"이라고 답했다.

나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앞으로 모든 게 달라져야 하는지,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하지만 순응에 맞춰진 우리 사회와 내 딸의 영재성이 부딪혀서 생기는 갈등이 이렇게 많을지는 몰랐다.


테스트를 하기 전까지는 딸이 그냥 똘망한 줄 알았다. 이제 생각해보면 미리 알아차려야 했다. 딸은 엄청 일찍 말이 틔었다! 두 살 때는 큰 무리 없이 딸과 정상 대화가 가능했다. 두살배기의 일상적 주제니까 장난감, 먹을거, 옷에 대한 대화였지만. 하지만 딸은 거의 어른 같은 어휘를 택했고 문장 배치도 제대로였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당황했다. 어느 날은 딸이 칠판에 사람 그림을 그렸다. 팔, 다리, 눈, 귀, 코와 함께. 선생님은 사진을 찍었고, 이 나잇대 아이가 이걸 해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해줬다.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영재든 아니든 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입학한 딸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했다. 동갑내기들과 놀지도,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파티에 초대라도 받으면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했다. 다른 학부모들이 내 딸을 이상하게 여기고 거리를 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엄마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나는 서운했다. 하지만 오늘까지 우리는 딸과 함께 외톨이로 지낸다.

나도 어릴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딸이 집에서는 행복하고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안심이 됐다. 그래서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딸이 자폐아인  같다는 말을 들었을 , 믿을  없었다. 그제서야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깨달았다. 우리 딸을 잘못된 시선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설령 정말 일리가 있는 우려라면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재미있는 문제 풀기를 하러 간다고 딸에게 말한 뒤, 영재 심리 상담사에게 데리고 갔다. 3시간 후 딸이 화장실을 가러 깡총깡총 뛰어나왔다. 다 끝나고 나서 딸은 우리에게 다음에 언제 또 올 수 있냐고 물어봤다.


결과 해설이 다가오자 나는 엄청 긴장했다. 발달장애일까봐. 말을 꺼낸 상담사의 첫 마디는 "귀하의 딸을 검사하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였다. 나쁘지 않았다. 자폐는 절대 아니고 극도의 영재성이라는 판정을 듣자 너무 안심이 됐다. 딸의 뇌는 12살 수준이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들었다.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아가게 되었다.

검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유치원에서 딸은 변함없는 문제아로 치부됐다. 말하자면 "영재? 그런 건 모르겠고 얘 좀 이상해요"라는 태도랄까. 딸이 외톨이라는 것에 대해 선생님이 자꾸 불평하자, 나는 드디어 폭발했다: "제 딸이 완전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선생님은 답했다: "맞거든요?"

기괴했다. 유치원에서의 딸은 과묵한 자폐아였다. 집에서의 딸은 쉼표 없이 떠들었다. 지질 시대, 공룡, 화석에 대한 딸의 설명은 그대로 글로 옮겨도 될 정도로 완벽했다. 주제와 상관없이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같이 읽는 모든 책은 아마 천 번도 넘게 봤을 것이다. 모든 디테일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았다.

상담사 왈, 딸은 인지 능력 수준으로 치면 당장 3학년에 입학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감정 발달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이 아직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어찌되든 너무 길게 끌지 말라고 당부했다. 영재의 뇌를 자극해주지 않으면 감정도 제대로 발달할 수 없다고.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은 5살 때 입학했다. 영재 학교 대신, 근처의 보통 학교로 결정했다. 딸의 친구들이 이웃에 살면 좋을 것 같아서. 딸도 학교가 가깝다고 좋아했다. 아직 너무 어리고 보호가 필요했으니까.

첫 4주 동안은 딸이 행복해했다. 그러다가 지루해했다. 딸에게 글을 한 번 들려주면 바로 이해한다. 딸에게 시를 한 번 읽어주면 바로 외워서 낭독한다. 학교에서의 끝없는 복습은 딸에게 오늘까지도 고통 그 자체다. 그래서 딸은 머지않아 포기하고 수업 중 딴생각을 했다.

반 년이 지나자 담임은 우리를 불러서, 딸이 자폐아인 것 같다고 전했다. 직업학교로 전학하는게 좋겠다는 조언과 함께. 이게 무슨 소린가! 입학 전에 교장과 상담한 적이 있다. 교장은 이 학교가 영재 교육 경험이 있다고 했다. 애석하지만 이 담임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정말 착하시고 아이들을 위하시는 담임이셨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 속 영재는 뛰어난 성적을 받는 아이었다. 딸의 성적은 평균이었다. 다 부질없다. 영재성은 애초에 높은 잠재력을 뜻한다. 잠재력은 저절로 개발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영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검사를 받았다.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결과는 같았다. 영재성 유, 발달장애 무.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아마추어들이 종종 영재성과 자폐성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굽히지 않자, 학교는 딸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고학년의 숙제를 내 주어서 더 어렵게 했다. 그렇다고 우리 딸과 그녀가 학습하는 특이한 방법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 소용이 없었다. 딸은 심신증에 시달리며 복통, 두통, 설사를 앓기 시작했다. 등교 전에 울음을 터트리고, 바닥에 널부러져 "나 거기 안 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너무 심했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의아했던 것은, 영재 특화 학교로 전학을 추진하자 딸이 거부했던 것이다. 딸이 좋아하는 담임과 학우들과 남아있고 싶어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친숙한 사회 환경이라는 사실이 마음 디딤목 같았나보다. 현재로서는 다시  괜찮아졌지만 우리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언제든 달라질  있다.

확실한 것은, 딸이 지금 9살이고 아직도 외톨이라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4년 동안 생일파티에 초대된 적은 5번 뿐이다. 가끔 놀러오는 여자아이 3명이 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딸의 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더 많은 친구들도 없다. 그들이 꼰대짓을 한다나. 딸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더 어린 아이들 봐주기 뿐이다.

친구가 없다는 것은, 오후는 오로지 우리 몫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긴 대화들을 나눠야 하는데 "이건 그냥 그런거야"라는 답은 절대 성에 차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다뤄야 하고 과학적이면 더 좋다. 우리 집이 무너질 수도 있냐고 딸이 질문하면, 결국에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철봉이 녹는 온도를 알아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힘에 부친다. 가끔 나도 모르게 몰래 생각한다. "왜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말면 안될까 쟤는?"


반면에, 딸과 함께 경험하는 것들  너무 아름다운 것이 많아서, 끝없이 감사하다. 보통 재능의 아이라면 하지 못할 경험들이다. 딸은 계속 줄거리를 상상하고 요즘에는 그것을 기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러 정치인들이 모여서 (슈뢰더  총리, 브란트  총리, 메르켈 총리, 기독교민주당 의장 크람프-카렌바우어, 니더작센주 장관 바일)  총리 콜의 상상  사촌과 함께 전국을 여행하며 모험을 겪는다. 슈뢰더가 소시지를 먹고 싶어해서 종종 차를 세워야 하고, 누가 당대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끔 언쟁을 벌인다.

딸은 그녀의 반짝이는 운동화가 괴테 선생님에게도 잘 어울릴거라는 내용에 대한 랩도 한다. 딸에게 요즘 쿨한 사람은 괴테, 특히 파우스트다. "머물러 주오..."라는 구절은 딸에게 이해가 안된다. 좋은 것이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왜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올해 연초에 영재 특화 과정이 있는 중학교에 딸을 등록했다. 그녀를 또라이로 보는 학교에서보다  나아지길 바라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있기를 바라며.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학부모들과.

하지만 동시에 이건 공동 학습의 파산 증명이기도 한다. 나는 진심으로, 다양한 아이들이 같이 학교를 다니는 것을 찬성한다. 하지면 그러려면 더 실력을 갖춘 선생님들과, 더 좋은 자원과, 학습의 개별적 눈맞춤과 포용성을 향한 진심어린 의지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배부른 소리라고 한다. 아마도, 현재의 시스템 속에서 학습 장애 아동의 학부모는 우리보다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포용에 대해 진지하다면 양쪽 끝의 아이들에 모두 해당되어야 한다.

가정 환경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들의 현실의 절반을 채워줄 수 없다. 딸 나이의 아이의 인생의 절반은 학교에서 벌어진다. 우리 심리 상담사 왈, 학교 환경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는 꾸준한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우리 사회가 매우 다양한 인간들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내 경험으론 참으로 삭막하다.

평준화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무조건 의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피한다. 우리 딸처럼 말이다. 항상, 또 다시.


기사 자체보다 어쩌면 더 흥미로운 건 기사 밑의 댓글이다. 댓글 특성 상 날선 말을 하고픈 사람들만 댓글을 남기는 현상이 극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된 댓글 내용을 취합한다면, 주로 질투다. 이것은 영재성에 대한 불신으로 표출된다. 영재성의 개념과 경험을 깎아 내려서 질투를 표현한다. 그리고 영재라고 알고 있었는데 까보니 별 볼 일 없더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아이큐고 뭐고 다 같은 사람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본문에 나오듯이, 영재가 오히려 더 위태로운 경우가 분명히 있다. (이는 연구에 따라서 결과가 다른 걸로 안다. 영재라서 사회 및 학업 성취가 더 위태롭다든지, 아니면 오히려 영재가 친구도 더 잘 사귀고 성적도 더 좋다든지.) 왜 위태로워지는지, 기사가 일례로 잘 보여준다.


나보다 다른 것을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것은 만인 공통적 본능이다. 하지만 영재성처럼, 한 편으로는 칭송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눈 앞에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받는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영재성이라고 답할 것 같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 않는가. 다만, 교육자라면 좀 고심해야 할 문제다. 교육자의 눈썰미에 영재의 미래의 한 갈피가 달려있을 수 있다. 물론, 교육자란 전문가니까 단순 눈썰미가 아니라 학습과 연구를 통한 소양이라고 불러야 해야겠다. 하지만 또, 교육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수도 없다. 위의 기사를 보면 학부모의 성찰도 크게 한 몫을 한다. 아이에 대한 기대를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표출해도, 아이는 더 힘들어 질수도, 더 좋아 질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영재에게 건투를 빈다. 너는, 당신은, 괜찮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