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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Jul 10. 2020

독일 대중정당의 여성 할당제

진영의 이념 논리를 벗어나는 법

오늘 가져온 기사는 여성 할당제라는 제도를 독일의 대중 정당에서 도입할 계획과 그 계획을 두고 존재하는 찬반 논쟁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우선 독일의 대중 정당이란 독일 정치의 정체성과 같은데, 2.5개의 거대 정당이 양대산맥으로 오랜 기간 이어진 거라고 보면 쉽다. 0.5인 이유는 기독교민주당에 자매당이 붙어 있어서 바이에른 주 (BMW의 그 지방 맞다)를 따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여성 할당제 토론은 이념을 끌어당기는 숙명인지, 애초에 이념에서 탄생한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반드시 이념의 프레임으로 토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념의 프레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치학의 관련 분야에서는 좋은 이념적 사고의 탄탄한 계보를, 나쁜 유사 이념적 파생 남용 현상과 구분한다. 여성 할당제 토론 같은 주제는 어쩔 수 없이 가열된다는 이유로 좋고 나쁜 모든 것이 붙는 것이 숙명인 것도 확실한 것 같다. 


물론, 여성 인권이 협소한 나라일수록, 소위 약자가 당하는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더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여성 인권이 왠지 강할 것 같은 독일 같은 나라는 여성 할당제를 둘러싼 토론이 덜 이념적일까? 신기하게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분노의 어조, 심지어 양측의 논지까지 비슷하다. 햄버거의 맛을 논할 때 토마토, 양상추, 패티 등을 기본적으로 논하는 것과 비슷하다. 콜라 시럽을 현지의 물과 섞었을 때 전혀 다른 맛이 나지만 말이다. 불평등과 할당제의 기본 개념들은 햄버거와 콜라처럼 전 세계에 수입되어서 정형화되어 있다. 그 외의 차이점은 논쟁의 문화와 정치의 문화라고 본다. 항상 덧붙이는 말이지만, 어느 쪽의 문화가 더 좋다는 뜻은 아니다 (동양 출신 여성이 독일 총리가 되는 사건 정도는 생겨야 내 입장을 다시 생각해보겠다.)


독일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음지에서 지내던 급진적 좌-우 세력들이 매체와 인터넷의 활성화로 인해 수면으로 드러났을뿐더러 물을 만난 듯이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다. 무명의 댓글 작성자뿐 아니라 정치 정당의 엘리트들도 합세하는 추세가 한국이 빨랐으면 빨라도, 다른 나라들이 절대 덜하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급한 사회의 문제들을 정치의 힘을 통해서 급속하게, 효율적으로, 지속 가능하게끔 개선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일 것이다. 


독일의 수장이자 오랜 기간 당 의장으로 임했던 안젤라 메르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분야에서의 동등성은 제가 보기에 그저 논리적입니다." 냉철한 물리학자처럼 들리는 발언이지, 열정적인 페니스트가 할 법한 말은 영 아니다. 메르켈은 여성 할당제를 위해 싸우는 열혈 투사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녀의 정당도 딱히 그렇게 될 일은 없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민주당 (CDU)는 12월에 정당회의가 찬성할 경우 여성 할당제를 도입하기로 했건만, 그 이유가 녹색당이나 사회민주당 대학생 그룹과는 다르다. 만약 도입이 성공할 경우 당내 지지자들은 다소 다른 논리 체계를 펼칠 것이다: 제1 대중 정당인 기민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을 필요로 한다.


당 내에서도 점점 확립되는 관점이다. 사회 구성원을 대략적으로라도 정비례하게 대변해야지만 기민당이 진정한 대중 정당으로 관철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기민당은 여성 할당제를 권력의 문제로 탈바꿈시켜서 이념 투쟁을 탈피한다. 워낙 감정적으로 가열된 주제이기에 좋은 선택이다. 그뿐 아니라,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보다 빠른 길이다. 진화는 개혁보다 큰 변화를 가져온다. 


여성 할당제는 그 자체로 발전의 의미는 없다. 최악의 경우 이념이자 최상의 경우 도구가 되어서 문제를 해소한다. 기민당도 자신의 낮은 여성 비율이 문제라는 것쯤은 통념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할당제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반드시 세월을 역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로지 여성의 약소한 대의권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세월의 역행이 된다. 하지만 그래도 반대 입장을 가진 자들이 고려해야 하는 점이 있다. 바로 장기간 여성 할당제를 원하지 않던 당 내 여성들이 정상에 오르자 갑자기 입장을 반대로 바꿨다는 점이다. 그 예로 최근에 기민당 의장을 잠깐 지낸 크람프-카렌바우어가 있다. 


여성 할당제를 반대하는 자들은 지난 몇십 년의 논쟁을 지나오며 논점을 관철할 시간이 많았다. 온전히 설득하기에는 부족했다. 할당제로 인해 자격의 원칙이 무시된다고 주장한다면, 정치권에서 실력도 중요하지만 당원 경력과 참을성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때로는 비례성이 중요하기도 하다. 대중정당 내의 임시직이 비었을 경우 규모가 큰 지역의 후보에게 주는 것이 좋다는 결정은 아무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정당 내에서 충분한 대의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기대는 비례 원칙만으로 충족하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끝으로 할당제 반대 입장의 최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당원, 보직, 의회의 여성 비율이 자동적으로 오를 거라는 전망 말이다. 예를 들자. 메르켈이 기민당 의장이 되었을 시절에 의회의 기민당 정파의 18.4%가 여성이었다. 지난 의회 임기에는 25%였다. 메르켈 시대의 해가 저무는 지금은 20%에 불과하다. 메르켈이 그토록 오래 수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기민당은 아직도 여성 지원을 반대하기 위한 논점으로 종종 사용하곤 한다. 그래서 메르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장기 최정상 임기로 인해 반대 세력을 강화한 셈이기도 하다. 


지금 제안된 여성 할당제는 위험도 내포한다. 내년부터 지역구 이상의 모든 대표직의 30%를 여성으로 채우라고 한다. 2023년부터는 40%, 2025년부터는 50%가 예정된다. 여러 예외를 적용하면 할당 비율을 피할 수 있고 동시에 방패로 사용할 수 있다. 서면으로는 존재하는 규정이니 말이다. 왜냐하면 기민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의 여성 부족은 고위급이 아니라 중간직과 하위직에 존재한다. 당원의 1/4은 여성이다. 하지만 2025년부터 보직과 당선 후보직의 절반을 그 작은 인력 자원에서 취해야 한다면, 여성 할당제가 자격 충족을 무시해서 불공정하다는 주장이 쉬워진다.


여성 할당제가 적용될 모든 자리를 채울 만할 여성의 인원이 너무 적다는 의견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건 할당제를 반대하는 논점이 아니라, 정당을 위해 일할 여성 구성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논점에 적합하다. 이것이 결국 논쟁의 핵심이다. 여성 할당제 자체만으로 기민당이 여성에게 더 매력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기민당 내 할당제 반대자들은 끝까지 이 정책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양측이 동일한 목적의 지지자가 되게끔 만들 수는 있다. 만약 여성 비율이 저절로 거의 비례적으로 채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에는 할당제를 다시 폐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 번역한 기사는 짤막하고 담백한 신문 기고일 뿐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나에게 최고의 글에 속한다. 어쩌면 독일 언론 기사 번역으로 절반 이상을 채우는 브런치를 만들겠다는 내 원래 의도를 설명하는 글이기도 한다. 또한 교포로서 어쩔 수 없이 정신적 혼혈에 가까운 내 사고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성적 정치가 좋다. 이성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좋다. 여느 누가 보기에는 냉혈할 수도 있고 나 자신도 그것이 우려될 때가 있지만 그저 배려심에 의한 노파심일 뿐이지, 정치와 사회처럼 이미 가열된 주제 영역을 대할 때 이성이 우선이라는 신념은 나에게 확고한 걸 넘어서 그냥 성향인 것이다. 그래서 이성이 아닌 다른 접근을 취하는 타인을 비이성적이라고 지적할 권리는 나에게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가지 책임을 쥐게 된다. 우선 나이가 부여하는 책임은 자동적으로 증가하며 이는 유교사회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서 선배라는 이유로 밥을 사게 된다. 그 말고도 남의 생명을 부양하는 책임, 즉, 부모가 되는 것이나 심지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까지 포함된다. 직업에 따른 책임은 당연하고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따르는 책임은 언제나 우습게 짓밟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육의 목적은 책임을 배우는 것이다. 당연히 신분 상승이나 자기실현을 나쁘게 말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먼저 유죄다). 하지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이 꼭 교실 속의 교육이 아니어도, 이성이라는 도구를 갈고닦는 기회를 그만큼 받았다는 뜻이다.


교육의 기원을 거슬러 가보자. 걱정 말라, 나도 잘 모른다. 웬만한 건 다 고대 그리스에서 나왔으니까 그때를 생각해 보자. 걱정 말라, 나도 그 시절 양반들 책 안 읽었다 (들춰본 적은 가끔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확실한 것은 통치와 정돈을 위한 이성적 사고의 토대를 너무 빈틈없이 놓아서 아직까지 거론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적 사고라는 도구이자 책임을 사용하는 지도자와 정치인들이 더 나왔으면, 혹은 드디어 좀 나왔으면, 하고 오늘도 작은 소원을 올린다. 불에 기름 붓는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끝장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모두를 파멸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주의 만능론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내 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이자 역설이다. 이성적 사고는 인류를 구원할 길이라는 사상은 대학과 과학에 이미 팽배하고, 단 몇 년이라도 이 안에 들어와 보면 얼마나 허무한 기대인지 알게 된다. 이성적 사고는 지금 정치와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완벽한 궁극 해결책은 아니다. 이성적 사고는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나치 역사의 잘 돌아가던 시스템을 보아라.


인간에게서 100은 바라지 않고, 바라서도 안된다. 누가 나에게 바라지 않았으면 하는 것의 대부분은 남에게서도 바라면 안된다. 이성적 사고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수도, 아닐 때도 있다. 이념 싸움이 점철되어 진전이 없을 때에는 가장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메르켈 총리 특유의 과학적 현실 이탈 화법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그녀가 난민 재난의 정점에서 택한 생명 구제 중심의 접근이 현재의 독일 사회 우경화의 원인이라는 비판을 그녀가 감내해야 한지 이제 수년째다.


쉽게 말해서, 이성적 접근은 절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다. 약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결정적인 겸허함이 결여되면 전국을 살인 공장으로도 만들어버리는 것이 이성적 접근이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가 책임을 부여한 정치와 사회 구성원에게는 진영 싸움의 수단밖에 안되는 식의 이념 논리를 해체하는 이성적 접근이 필수사항이지, 선택사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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