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작가의 밤

by 한량

잘하고 있다, 아니다, 잘하고 있다, 부족하다, 잘하고 있다, 아직 멀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흘러가는 생각 속에서 '잘하다'가 맞는 것인지, '잘 하다'가 맞는 것인지도 갸웃거려질 때면 잠시 노트북을 접었다. 하고 있는 일과 전혀 동떨어진 일이 필요할 때 동치미를 담근 경험이 이번에도 유효하다. 냉장고를 열어젖힌다. 가을을 너머 겨울인 만큼 거기엔 언제나 싱싱한 무가 들어있다. 얼마간의 쪽파도 함께다. 밀가루를 꺼내 풀을 쑤고 자박자박 썬 무엔 고춧가루를 미리 뿌려둔다. 이러면 색이 고운 빨간 물이 든댔나. 무의 쓴 맛이 나지 않는다고 했었나.

김치통 가득 깍두기를 담가놓고 손을 씻은 후 다시 돌아와 앉는다. 원고는 중반을 넘어가지만 아직 할 말이 많다.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말 그대로 옮겨놓는다. 글로 읽는 원고가 아니라 말로 할 원고이기 때문에 그렇다. 웬만하면 외워서 하고 싶지만 미래는 모를 일, 눈치껏 컨닝할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 중요한 키워드는 굵은 글씨체로 바꾸고 폰트 크기도 키워놓는다. 그런 대목을 몇 개 옮겨보면 이렇다.


마드리드에선 게르니카 / 론다에서는 길거리 가로수 오렌지 / 세비야에선 진짜 더웠고요 / 그라나다에선 집시 / 말라가에선 조용히 바다를


도시들을 줄줄 주워섬기는 이유는 지금 쓰는 원고가 북토크를 위한 원고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하여'. 나는 내가 스친 도시들의 이야기를 쓴다. 좋아하고 사랑하고 미워했던 도시들에 대해 쓴다. 한여름의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빙글빙글 지구를 돌다 한겨울의 서울에 이른다. 이야기 속엔 꼬마도 들어있고 우리 엄마도 들어있다. 지긋지긋하게 미워하고 열렬히 사랑한 사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아니 '미어진다'라고 해야 할까? 마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어떤 분들이 와 주실지 모르기에 떨리는 마음이 된다. 떨림을 없애기 위해선 연습을 하면 된다. 자신이 없으면 두려운 마음이 들고 그건 말과 눈빛에도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며칠을 쪼개 여러 번 연습을 거친 끝에 거의 원고를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벽 앞에 서서 혼자 웃고 혼자 너스레를 떨며 반복한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스톱워치의 정지 버튼을 누르니 47분 남짓의 기록이 남았다. 원고 중간에 등장하는 환기 타임, 오신 분들께 짧은 질문을 드리고 돌아가며 답을 듣는 시간을 합하면 대략 1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 뭐, 그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야 느슨해진 마음으로 이케아 타포린 백을 연다. 대용량 감자칩과 샹그리아 두 병(화이트와 레드로 준비했다), 레몬 두 알과 과도, 참크래커 한 박스, 귤 한 꾸러미, 플라스틱 컵들, 이 정도면 되려나? 여기에 노트북과 프린트한 원고도 함께다. 수줍게 혼자만의 발표복-바르셀로나 대학교 기념품샵에서 구매한 후드티-를 입고 거울을 본다. 이제 된 거지. 다시 마음을 다독인다. 어떻게든 되겠지. 낑낑거리며 도착한 책방 앞의 편의점에선 돌얼음 한 봉지를 산다. 제대로 하려는 의지는 이런 디테일에서도 나타난다. 아, 제대로 마시려는 의지다.

그리하여 일찍 어두컴컴해지는 12월의 토요일 저녁, 열두 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 우리는 달콤한 술을 홀짝이며 사랑하는 도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간략하게 만든 키노트를 배경으로 두고 안 떨리는 척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봤더니 나름대로 대단한 모습이었다. 빔 프로젝트와 슬라이드 사이 내 얼굴은 어디선 불그죽죽하고 또 다음 장에선 대놓소 푸르딩딩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쩐지 빛이 강렬해 눈이 조금 부신다고만 생각했다. 푸르렀다 붉어졌다 연신 변하는 얼굴이 하는 이야기에 비웃음 없이 귀 기울여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과자를 바스락바스락 먹고, 여기저기서 귤도 까먹는다. 나는 잔을 한 번 비웠다. 아니 두 번 비웠나?

사진은 스페인책방의 에바 사장님

그래서 이 모두가 끝나고 하루가 또 이틀이 지난 어느 오후. 내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 란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지난 가을과 겨울의 초입, 그리고 지난 주말까지 나는 줄곧 달력의 일정을 바쁘게 체크하며 지내왔다. 분초까진 아니어도 날과 주는 충분히 검토해야 했는데 말이다. 그 한가함이 좋고 또 적당히 불안했다.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 한량님은 정말 한량 안 같아요, 이 말이 정답이었는지 모른다.


여기저기서 산 책, 선물 받은 책을 책등이 잘 보이도록 다시 꽂아두었다. 마침 반납 날짜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읽은 책을 반납하고 새로 읽고 싶은 책들을 빌려서 돌아오는 길. 프리랜서적 삶,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랜서의 시간 활용과 비용 산정에 대해 생각했다. 프리랜서의 노동은 어떻게 매겨지는가. 원고를 쓰고 원고를 모아 책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영역의 조율은 뚜렷한 노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입고처를 알아보고 튼튼한 박스를 구입해 포장해 부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북토크 준비를 하고 이를 성실히 그리고 다분히 즐겁게 해내는 것도 역시 노동에 속한다. 청탁받은 원고를 성실하게 써서 보내는 것도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그 외의 영역, 이 가시적인 활동을 준비하기 위한 작업들은 노동으로 볼 수 있는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책을 읽는 활동은? 관련 행사 혹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들을 트래킹하는 것은? 팟캐스트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 일은? 원고를 쓰다 막혀 굵은 무의 껍질을 벗기고 쪽파를 다듬는 행위는? 레스토랑에서 영업 오픈 시간 전, 재료를 손질하는 밑작업이 꼭 필요한 것처럼, 나의 깍두기 담그기도 작가로서의 본 작업을 위한 밑작업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비용을 어떻게 산정하고 청구할 수 있을 것인가. 대체 얼마나? 당최 누구에게?


바람이 뺨을 후려치고 손 끝이 곱아오는 가운데 빌린 책으로 무거워진 에코백을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반납해야 하는 책 중 한 권을 잘못 가져온 탓에 다시 도서관을 방문해야 한다는 점을 슬프게 여기면서 집으로 향했다.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 짐들을 들고 곧장 어린이집을 들리긴 어려워 보인다. 어느새 도합 20키로에 가까워진 유아차와 꼬마를 눈 속에서 핸들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세 시 반, 짐을 덜 여유가 있다. 나는 방향을 틀어 아파트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빌린 책들을 우편함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에세이-자신의 겪은 일에 대해 진솔하게 쓴 이야기- 몇 권이 그렇게 차가운 우편함 속으로 사라졌다. 까닭 없이 송구스러웠다. 그곳에 버리는 것도 아닌데, 돌아올 때까지 놓아두는 것뿐인데. 어떤 마음은 이유 없이 파들파들하다. 여리고 생생해 함부로 놓아두기 어렵다. 내가 빌린 책들 역시 그렇다. 나는 그것들을 어떤 이들의 분신, 흩어진 작은 자아라 여기나 보다. 내 책들을 생각할 때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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