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타일 프리의 독일 사우나 탐험
오늘은 어디를 갈까, 그간 바빴던 달이 잠시 여유를 찾았다. 밤늦게까지 열심히 구글맵을 살펴보더니 여기는 어떻냐 묻는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작은 마을. 거기엔 온천수가 흐르는 수영장과 사우나가 있다고. 수안보 같은 곳이라 한다. 좋아, 그럼 수영복을 꺼내볼까. 네 사람의 수영복, 꼬마의 구명조끼, 갈아입을 옷, 간단한 간식을 챙겨 그 길로 떠난다. 독일엔 수영장 탈의실도 공용으로 쓴다고 들은 것 같아. 사우나할 때도 혼성으로 하고. 근데 다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가볍게 꺼내니 달이 답한다. 우리가 가는 곳도 그런 곳이래. 응, 응?
그래서 우리의 여정은 가벼운 주말 나들이에서 심도 깊은 탐험으로 변한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랄까. 낯선 문화 속으로 저벅저벅 들어가는 느낌. 그런데 걸친 것은 별로 없는 채로. 아니, 뭐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긴 하니까. 그렇게 미풍양속을 저버리고 인륜을 거역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사실 어엿한 성인, 벗으라면 못 벗을 리 없겠다만 아무래도 아버지와 함께라면 조금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말의 호기심에 다량의 우려를 곁들여 떠난 길이다. 아우토반을 달려 한적하고 호젓한 산길 끝, 작은 마을에 다다른다.
이곳 온천 마을은 예로부터 유서 깊은 곳이라 한다. 무려 유네스코에도 지정되어 있다고. 그 역사는 로마인들이 온천을 만든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단한 로마인들. 그곳이 어디든 길을 낸 다음 목욕탕부터 만들었단 말이지. 토가 자락 느슨하게 풀고 풍덩풍덩 뛰어들었겠지. 일요일 점심, 로마의 발자취를 기리려는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보아하니 내부 인원수를 조절하는 모양이었다. 발갛게 익은 얼굴들이 퇴장하면 기다리던 이들이 입장할 수 있는 시스템. 얼마 후 우리 차례가 되었다. 호기롭게 수영장과 사우나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종일권을 사기로 한다. 어린이는 사우나에 갈 수 없어요. 그래도 3장 모두 사시겠어요? 친절한 직원은 여러 번 묻는다. 누군가 애만 남겨두고 사우나에 가 사단이라도 났던 것일까.
대체 사우나가 어떤 곳이길래.
정녕 라커룸부터 공용이었다. 다행히 휠체어 이용자 혹은 가족단위로 쓸 수 있는 큰 칸막이가 있어 나와 달, 꼬마는 그곳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빠, 아빠는 대강 눈치껏 갈아입어주세요. 아빠는 다 큰 어른이잖아요? 매몰찬 효녀는 라커룸에서 나와 수영장으로 들어선다. 쾌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곳곳에 온도와 수심이 다른 풀이 있고, 몸을 데울 수 있는 작은 사우나 시설도 있다. 통유리 밖으론 수영이 가능한 레인과 온수풀이 있다. 그리고 안팎 곳곳엔 썬베드가 놓여있다. 나도 모르게 한국인 특유의 눈치게임 레이더가 발동하려 하나, 곧 그러지 않아도 됨을 깨닫는다. 썬베드나 카바나나 자리는 여유있다. 추가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에 원하는 곳에 앉으면 된다. 적절한 인구밀도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야외 온수풀에 몸을 담근다. 물은 따숩고 공기는 상쾌하다. 수모를 쓰지 않는다고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된다. 수모 대신 야구모자는 안 되나요? 이런 비굴한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카메라 사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아무도 핸드폰을 꺼내지 않는다. 그 빈 손을 채우는 것은 책, 그리고 맥주다. 우리도 그 분위기에 차차 적응해 간다. 꼬마는 제 정체성을 버스기사님에서 돌고래로 바꾸더니 우리 셋의 등에 고루 매달려가며 물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푸짐한 점심을 먹고서도 바로 들어가자고 조른다. 일단 내가 꼬마를 마크하겠노라고, 둘은 사우나에 다녀오라고 등을 떠민다. 커다란 배스타월을 하나씩 챙겨든 달과 아빠가 사우나로 떠난다. 척후병을 보낸 셈이다. 혼성 사우나의 기미와 동태를 파악하는 임무를 지닌.
얼마 지나지 않아 발그레한 얼굴의 둘이 돌아왔다. 그리고 앞다퉈 이야기를 해준다. 13개의 사우나룸이 있다, 마침 갔을 때 이벤트가 있었다, 사우나의 달궈진 돌에 물과 오일을 뿌린 뒤 부채질을 해서 강한 증기를 만들어 내더라, 그런데 열기가 너무 강해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더 궁금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일단 사우나 공간에 들어가기 전 수영복은 다 벗어야 한다. 샤워가운이나 타월을 두르는 것은 자유, 물론 안 두르는 것도 자유. 사우나뿐만 아니라 곳곳에 까페를 비롯한 휴식 공간도 많다고. 이젠 내 차례다. 사우나 문 앞-텍스타일 프리라고 적혀있다-에서 수영복을 벗는다. 알몸에 배스타월을 야무지게 두르고 입장한다. 당연히 두근거릴 수밖에.
에스테틱이나 편집샵에 온 느낌이다. 넓은 공간 곳곳에 여러 개의 사우나룸이 있다. 입구엔 온도가 쓰여있고, 작은 옷걸이엔 여러 개의 샤워가운이 걸려있다. 그 옆엔 안경보관함도 있다. 순간, 오히려 안경은 써야 하지 않나요? 란 문장이 스친다. 지극히 유교적인 사회에서 발아한 늙고 낡은 농담. 나는 신고 있던 쪼리만 잘 벗어두고 사우나에 들어선다. 붉은 소금벽돌로 된 방이다. 가운데는 공기를 데우는 장치가, 주변으론 나무로 된 계단이 두어단 있다. 건식사우나의 강렬한 공기만큼은 낯설지 않다. 사람들은 홀랑 벗거나 반쯤 벗은 상태로 앉거나 누운 채, 땀을 흘리며 열기를 견디고 있다. 나는 꽤 익숙한 척, 그러나 내 타월의 여밈 정도를 은근하게 체크하며 자리를 잡는다. 슬슬 온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맥반석 위 달걀이 된 느낌.
그러고 있자니 헐벗은 풍경에도 차차 익숙해진다. 붉은 몸, 하얀 몸, 그을린 몸. 늘어지거나 팽팽한 몸들. 다들 벗고 있으니 어느 부위든 그냥 몸의 일부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타인의 팔꿈치나 엄지발톱을 보고 호들갑 떨지 않듯, 금기가 사라진 공간에선 몸은 그냥 몸처럼 느껴졌다. 바로 이것이 원효대사 해골물인가, 생각하다 뜨거워진 머리에 이상한 비유가 깃드는 것 같아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달궈진 온몸 구석을 파고드는 시원한 공기, 높이 솟은 나무 너머로 세차게 흐르는 강물. 마침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햇살이 수영장 위로 쏟아져 내린다. 하얗게 반짝이는 물결, 그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 그렇다. 사우나 구역에도 너른 잔디밭과 썬베드, 그리고 야외 수영장이 있다. 나는 놀라고 만다. 구한말의 보빙사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