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백주대낮에 말입니다
나는 일단 썬베드 위에 눕는다. 썬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아 볕을 고스란히 받는다. 눈꺼풀뿐만이 아니다. 배스타월 밖으로 내놓은 몸 곳곳에도 빛이 쏟아진다. 사우나에서 달궈진 몸이 산바람에 식다가도 다시 볕에 데워진다. 절로 나른해진다. 그대로 스르르 잠들고 싶다. 그만큼 팽팽한 감정선이 없는 공간이다. 위협감을 비롯해 누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 성적인 긴장감, 위화감, 불쾌함과 분노, 해소되지 못한 분노에서 빚어지는 열패감. 익숙하게 걸쳐온 감정들이 옅어지는 게 신기하다. 이보다 더 감싸고 더더 동여맬 때도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곤 했는데.
감은 눈을 뜨고 둘러보면 영화 속 배경 같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화사한 풍경. 문득 저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제법 북적였던 풀은 이제 한적하다. 다들 젖은 몸을 말리러 간 것일까. 누운 썬베드에서 수영장까진 서른 걸음 정도. 무심하게 툭 배스타월을 털어내고 당당히 서른 걸음을 뗄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해 보고 싶다. 해 아래 드러난 맨살, 거기에 스미는 차가운 물. 상상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나는 누운 채로 잠시 고민한다. 내 모국어에서 '백주대낮'이란 단어는 이어질 문장에서 행위하는 주체의 정신 나감 정도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하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정신 나감은 많고 많은 정신 나간 짓 중에서 특히 수치를 모르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는데. 과연 이 강렬한 백주대낮에 저 수영장에 몸을 담글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바람이 살랑 분다. 옅은 구름이 해를 스치고 다시 멀어진다. 나는 용기를 낸다. 내어보기로 한다. 여기에 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설령 있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슬그머니 부푸는 자의식의 바람을 빼 보기로 한다.
배스타월자락 고이 쥐고 수영장 가장자리까지 걸어간다. 발아래 시원한 물이 느껴진다. 그제야 훌러덩 풀어내려 입수하는 계단 언저리에 걸어놓는다. 자연스럽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쭈뼛거렸을 것이다. 쭈뼛을 넘어 뚝딱거렸을지도 모른다. 뚝딱이고 싶지 않다는 염원을 담아 온몸으로 뚝딱거리는 나. 곧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몹시 홀가분한 몸이 된다. 계단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간다. 물이 가슴팍 위로 차오르자 되려 안심되는 마음. 감각은 보다 직관적이다. 시원하다. 상쾌하다. 좋다. 수영장 벽에 등을 대고 몸에 힘을 뺀다. 물아래로 흔들리는 내 다리. 그렇게 조용한 발장구를 친다. 헤엄을 친다. 이런 순간에도 하루키의 문장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여자들뿐만 아니라, 섬 안쪽의 인적 드문 해변에 가면 수영 팬티를 벗어던지고 하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일광욕을 즐기는 남자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알몸으로 있는 여자도 있다. 나도 한번 그렇게 해본 적이 있는데 상당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세상에는 '음부'라는 말이 있지만, 햇빛 아래 내놓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음부'가 아니라 그냥 몸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먼 북소리> 중에서
정말이지 그렇다. 몸의 일부를 새롭게 인지하는 '상당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키 큰 플라타너스의 그늘,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거품. 사방을 메우는 강물소리. 맨몸으로 치는 헤엄은 편안하고 아늑했다. 오목하고 움푹한 그래서 빛을 보기 어려운 곳에도 골고루 해가 스몄다. 처음 해 보는 경험이라 그랬을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을 해내서 더 그랬을까. 부드럽게 발을 놀리며 규칙과 통제, 터부와 해방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어떤 곳에서는 왜 금기시되는지. 맨몸으로 하는 수영처럼, 홀로 하는 운전처럼, 어떤 옷을 어떻게 입는지에 관해서도. 언제 어디를 누구와 다니는지에 대해서도. 때론 존재 자체로 겪어내야 하는 일들을.
용기 내 들어온 수영장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다시 가봐야 했다.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가 좀 더 쉬웠다. 조금 덜 뚝딱이는 자세로 배스타월을 낚아채 스르륵 걸쳤다. 산뜻한 기분으로 사우나 구역을 통과한다. 내 시선은 아까보다 덜 번민하고 마음은 더더 덜 헤맨다. 전형적인 통과의례랄까. 문을 지나기 전과 후가 사뭇 달라지는 경험. 한 번은 해 볼만하다. 두 번은 더 해 볼만하다. 늦은 오후 다시 찾은 사우나에서 이번엔 똑똑 떨어지는 비를 맞았다. 앞산에 걸린 안개가 꾸물꾸물 흘러내렸다. 강물은 불어나 세차게 흘렀다. 종교적 함의, 과학적 효능, 문학적 상징, 사회적 관습을 떠나 맑은 물 깊이 맨몸을 담그는 것은 언제나 좋다. 감각이 그렇게 이른다.
펼쳐본 김에 서문의 일부를 옮겨본다. 간단하고 사실적인, 거리를 두며 꾸준히. 새길 만한 말이다.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쓴다, 이것이 기본적인 자세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나, 되도록 간단하고 사실적으로 쓸 것. 다양하게 변해 가는 정경情景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계속 상대화할 것.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먹은 대로 잘 써질 수도 있고 잘 안 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작업을 자기 존재의 수준기水準器로 사용하는 것이며 또한 계속 그렇게 사용해 나가는 것이다.
<먼 북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