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뤼데스하임
우리의 마지막은 겨울날의 경주역. 2박 3일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길이었다. 건강히 잘 지내요. 꼭 놀러 와야 해. 이런 작별의 말을 나누었다. 기차 안에서 나는 또록또록 눈물을 흘렸다. 몇 시간 뒤,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조는 다급했다. 아빠, 아빠. 혹시 차에 내 지갑 떨어져 있나 좀 봐줘. 서울 왔는데 지갑이 없어. 다행히 지갑은 차에서 발견되었다. 고전적인 신파로 빠지려다 김이 새버린 이별. 그렇게 헤어진 후 계절이 바뀌었다. 겨울에서 봄, 그리고 슬그머니 여름의 기운이 풍기기 시작한 지금. 아빠가 도착했다. 28인치의 캐리어와 함께.
캐리어 안에선 내가 부탁한 각종 물건들이 한아름 쏟아져 나온다. 거기엔 여름잠옷도, 도어스텝퍼도, 패딩수선용 스티커도 있다. 너무 사소해 받고 보니 부탁이 머쓱해진 그런 물건들이다. 물론 꼬마를 위한 선물도 있다. 할아버지가 어떤 선물 가져갈까? 물을 때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항기!'라고 말했던 꼬마. 이유를 물어보면 재미있어서라고 답했던 꼬마. 그 말에 진짜로 부항기, 그것도 007가방처럼 생긴 큼지막한 세트를 통째로 가져온 아빠다. 이것도 있다, 하며 꺼낸 것은 뽀로로 무선 조종 자동차. 박스엔 28달러란 가격표가 붙어있다. 아빠! 이거 면세점에서 샀어? 진짜 비싸네. 하니, 48개월이면 어떤 걸 좋아하느냐 물어보고 추천받은 장난감이라 한다. 박스 겉면엔 너무 정직하게 4세 이상이란 문구가 쓰여있다. 정확하긴 하네, 아빠.
장거리 비행의 여독을 걱정했는데 아빠는 의외로 멀쩡하다. 짐을 풀어놓고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무사 도착을 자축한다. 독일 요리와 맥주의 맛을 음미하는 아빠. 맛있어요? 입맛에 맞아요? 나는 아빠의 기색을 살핀다. 맛의 미묘한 차이점들을 캐치해 내지만 그건 호불호를 내색하는 것과 다르다. 이건 이런 맛이네, 저건 저런 맛이네. 아빠의 평은 미사여구와 아첨 없이 담백하다. 그래서 진실하다. 아빠의 세계는 냉혹한 상대평가가 아닌, 온난한 절대평가의 세계다.
비교와 차별 없는 자애는 일평생 사랑을 부어온 영역, 음주에서 특히 드러난다. 맥주만 들입다 파는 나와 달리 아빠는 모든 주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구하기 어렵다는 한정판 위스키에게도, 초록병의 소주에게도 공평한 사랑을 베푼다. 막걸리도 청주도 고량주도 포트와인도 모두 그렇다. 그래서 길든 짧든 돌아오는 여행가방 안엔 언제나 아빠를 위한 술 한 병이 들어있었다. 그건 적당히 묵직하고 알맞게 알딸딸한 도수의 마음이었다. 내 사랑은 말대신 조용히 찰랑거리고, 아빠는 그걸 늘 남김없이 모두 비웠다. 그리고 아무런 주사 없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들곤 했다.
그래서 아빠와 함께 토요일, 뤼데스하임으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몇 번 타봤다고 내 눈은 익숙함에 흐릿한데, 창밖을 보는 아빠의 눈은 제법 반짝거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그 위의 푸른 포도밭, 세모 지붕의 그림 같은 집들. 작은 간이역에 내려 돌길을 따라 걷는다. 포도밭 위를 완만히 오르는 케이블카를 탄다. 아빠는 꼬마를 꼭 안은 채 창 없는 케이블카로 밀려드는 바람을 맞는다. 눈 아래로는 손바닥만 한 포도잎들이 넘실거린다. 그 풍경은 참 호젓하고도 아름다워 내 밭도 내 포도도 아니건만, 무럭무럭 영글기를 축원하게 된다. 해도 바람도 비도 자라기에 적당해 올해 작황이 좋기를, 그러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남의 나라 포도들에게 K-덕담을 나누게 된다.
도착한 언덕 아래론 마인강이 흘렀다. 이마에 쏟아지는 햇볕과 부는 강바람. 또렷한 명암. 꼬마는 신이 나 찧고 까불고, 그걸 바라보는 아빠는 웃고. 나는 나대로 가족적인 정경에 홀로 감동하고. 돌아오는 길 꼬마의 유아차엔 지역 특산물인 아이스바인 2병과 꼬마의 포도주스 2병이 실렸다. 퇴근길 2호선만큼이나 붐비는 기차 안에서 우리의 와인과 주스는 안전하게 살아남았다. 넷이 둘러앉아 건배를 한다. 꼬마는 자줏빛의 포도주스를 가리키며 자기도 와인을 마신다며 우쭐거린다. 물보다 진한 피는 어디 안 가는구나 싶다. 불콰해진 아빠의 얼굴엔 은은한 행복이 깃든다.
문득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의 마이클을 떠올린다. 주인공 재규어의 아버지인 마이클은 혼백만 남은 상태로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난다. 누군가 독경이라도 외면 곧 성불할 것처럼 슬며시 흐릿해지는 마이클. 그래서 마이클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아버지다. 시종일관 웃긴 그 만화에서 마이클의 에피소드는 이상한 여운을 남겼다. 우리 아빠도 때론 그런 캐릭터였으니까. 웃긴데 어딘가 짠하고 안쓰러운 사람. 때론 투명하게 흐려질 것만 같은 사람. 그러나 그렇게 마냥 옅어지기엔 아빠가 마셔온 술이 좀 많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좀 많다. 그래서 아빠는 한없이 레드에 가까운 아버지가 된다. 딸이 사들고 온 술을 온몸에 꾹꾹 눌러 담은, 그래서 진하고 붉은 아버지다.
우리의 여행이 아빠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까. 그러리라고 믿는다. 산 좋고 물 좋은 유원지, 계곡과 해수욕장, 산과 섬. 아빠의 포니를 타고 방방곡곡 다닌 기억이 지금까지 선명히 남아있으니. 함께 걷고 구경하고, 맛있는 걸 사 먹기도 해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같이 반주를 기울이는 이 시간이 참 귀하고 소중하다. 낯간지러운 말하는 대신 오늘도 서로의 빈 잔을 채워준다. 그게 우리의 사랑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