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nes own Seoul

말 많은 미용사를 만났다.

by 한량

뿌리염색을 할 때가 되었다. 지난 예약을 찾아보니 2달 전, 조금 더 기다렸다 해도 될 것 같지만 주말에 가족 행사가 있으니 그냥 하기로 한다. 그때 담당했던 디자이너는 미용실을 옮겼는지 예약 탭에 이름이 없다. 뿌리염색에 엄청난 기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근처의 다른 미용실을 찾아본다. 지도 탭을 움직이다 번화가 대로변에서 살짝 못 미친 곳, 그것도 2층에 위치한 미용실을 찾아낸다. 가격은 안 나와있지만 왠지 저렴하게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느낌의 근거는 이렇다. 경력 오래된 사장님이 있다. 유난한 세련됨-그리하야 고객의 기도 죽이고 마는-을 뽐내지 않는다. 홍보보다는 실력으로 오래 살아남은 곳 같다. 이곳에서 제일 젊어 보이는 디자이너를 고른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을 것 같다.


예약한 시간에 맞춰 미용실에 들어선다. 짐작대로 소박한 그러나 깔끔한 분위기다. 벽에 걸린 스타일링 사진들은 조금 바랬고, 느린 템포의 팝송이 흐르고 있다. 점심시간 전임에도 이미 두어 명의 손님이 한참 머리를 하고 있다. 이윽고 자리에 앉아 담당 디자이너와 짧은 인사와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언제 염색 마지막으로 하셨어요? 지금 겉이랑 안에 톤이 조금 다른데 그거 맞춰서 하면 되겠어요. 전에 하이라이트도 넣으셨구나. 이거 그냥 덮기는 아쉬우니까 뿌리만 하세요. 등등.


나는 잡지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다. 이거 괜찮으세요? 하고 가져온 것은 <여성조선>. 아주 오랜만에 보는 잡지다. 허나 미용실에서 읽는 잡지는 또 특별한 맛이 있으므로 나는 반갑게 받아 쿠션 위로 가져다 놓는다. 30대 파이어족에 대한 특집 기사가 있다기에 기꺼이 펼쳐본다.


기사는 예상 밖으로 시시했다. 인터뷰들은 짧고 밍밍했다. 얼굴은 깠지만 구체적인 액수는 깔 수 없어 그런 모양이었다. 내 마음을 읽었던 걸까? 머리의 구획을 나누던 디자이너는 문득 코스모폴리탄 이야기를 꺼낸다. 알지, 알지. 그 시절 코스모폴리탄은 미용실에서도 제대로 정독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그렇게 물꼬를 트게 되어 그만


디자이너의 가족 구성원, 그들의 체격과 식성, 쌍꺼풀의 유무, 남매의 나이 차이, 어릴 때 즐겨 놀던 놀이, 남자친구와 만난 햇수, 먼 미래의 자녀 계획(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앞으로의 계획(나중에 지방도시에 내려가 작은 건물을 짓고 1층엔 까페, 2층엔 미용실, 3층엔 집을 꾸린다), 차례로 어린이집 보낼 계획까지 알게 되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미용실을 살짝 만만하게 생각하고 덥썩 의자에 앉아 가운부터 걸친 오만함에 대한 벌이라도 받듯, 뿌리염색 가격은 만만하지 않았다. 그럼 혹시 모닝할인 같은 거 있나요? 아니면 다른 할인이라도.. 하고 말끝을 흐리는 내게 디자이너는 이게 10년 전 가격이며 사장님이 가격을 올리려다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이야기도 해주고 만다. 딱 가격을 올리려고 했는데요. 그게 터졌잖아요. 코.로.나. 마지막은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그만 수긍하게 된다. 네, 그렇긴 하죠. 코.로.나.


오고 가는 이야기 속 충분한 래포가 쌓인 걸까. 디자이너는 두피에 바른 염색약을 확인하고선 말한다. 원래 영양은 추가인데요, 그냥 넣어드릴게요. 원래 다 해주는 건데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좋다. 게다가 머리 감겨주는 솜씨도 마음에 든다. 거품만 풍성하게 내놓고 살금살금 쓰다듬기만 해서 영 답답한 곳이 많은데, 이 선생님은 손끝에 힘을 줘 시원하게 문질러준다. 어떤 섬세함- 머리 감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누울 때 눈 위에 마른 수건을 얹어주는 서비스 같은 것-은 없으나 그래도 좋다. 뒤통수 아래까지 박박 시원하게 헹궈주는 박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다시금 디자이너의 질문이 이어진다. 머리 길이는 안 다듬으시나요? 나는 감은 눈으로 잠시 어리둥절해한다. 보통 그런 건 처음에 다 정하지 않나? 네, 길이는 뭐.. 하고 눈 감은 채 대답하자 원래 저희가 컷은 2만 원인데, 염색하시는 손님한테는 그냥 해드리거든요.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뭐야, 뭐야. 그러면 사람 마음이 꼭 받아야 좋을 거 같고 그렇잖아. 그.. 그럼 조금만 다듬어 주시겠어요?


언제나 끝이 상한 머리칼은 준비되어 있으므로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해도 좋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기장을 조금 정리한다. 앞머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역시 나는 잘 결정하지 못하고 적당히 알아서 해 주세요. 라고 말한다. 그럼, 여기 옆을 조금만 자를게요. 가는 빗이 머리를 빗어내리고 은색 가위가 얼굴 가까이 쑥 다가온다. 절로 눈을 감으니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 이어 트리트먼트 하는 법과 드라이하는 법에 관한 일장연설이 이어진다. 미용실 오면 매번 혼나요, 저. 나는 애정 섞인 훈계를 갈구하는 사람처럼 은근하게 장단을 맞춘다. 홍상수 영화의 대사 같다. 외로운 예술 늙다리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완성된 머리를 하고 갈 곳이래봤자 동네 스타벅스일 뿐인데 내 앞머리는 봄날의 여린 버드나무 가지처럼 찰랑거리고 있다. 새 마스크까지 꺼내 주며 챙기던 세심함과 별개로, 모든 과정을 마친 내 볼엔 짧은 머리카락 서넛이 붙어있다. 나는 잘 떼어지지 않는 그것들을 손으로 집느라 잠시 애를 쓴다. 가죽 소재의 가방에서 가죽으로 된 지갑을 꺼내는 것을 보고 디자이너는 가죽 좋아하시나 봐요, 한다. 아 예.. 나는 자꾸 정재영 같아진다. 지갑에서 카드까지 꺼내놓고선 제로페이 되나요? 묻는다. 된다는 말에 바코드 화면을 열어 결제하면서 이거라도 할인받아야지, 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는 종이쿠폰을 건네주며 다음에 오시면 뭐뭐 해드릴게요. 한다. 네,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가게를 나서며 다음 뿌리염색은 어디로 가지, 생각한다. 시시하고 밍밍하게 끝을 내고 싶지 않기에 명시해둔다. 뿌리염색과 영양 추가 그리고 기장만 살짝 다듬는 컷까지 합한 가격은 6만 원, 서울사랑상품권으로 결제하여 5만 4천 원이었다. 2021년 늦가을, 우리 동네 미용실 막내 디자이너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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