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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Feb 01. 2022

#3 냉면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자신만의 독보적인 취향과 식견을 지닌 지성인이라면 모두 엣헴 하고 목을 뽑고 '내가 가는 냉면집은 말이야..' 하고 말을 꺼낼 때가 있었다. 난 대체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던데? 하고 천진난만하게 물으면 '어허, 그건 처음에만 그렇지. 자꾸 먹다 보면 딱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진짜라고도 하고, 반죽에 들어간 곡물 비율에 따라 갈래가 달라진다고도 했다. 어쩜 다들 그리 잘 알지? 그래서 냉면을 사랑하는 것은 미식가의 도드라지는 취미나, 대를 잇는 장인정신을 흠모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들 또렷한 감식안을 가진 듯 보였다.


뒤늦게 한 마디를 보태려 한다.


나도 나만의 냉면이 있다.


대학 시절 선배들이 데려가는 밥집이라곤 빤했는데, 그중에 빤하지 않은 곳이 있었다. '너네 혹시 을밀대 아냐?' 물으면 눈만 꿈뻑거리던 때,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을 하고 선배들이 데려가던 곳. 그곳은 버스 정거장 뒷골목의 과일 가게와 치킨집과 작은 슈퍼 사이에 자리한 냉면집이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당겨 앉고 인원 수대로 냉면을 시켰다. 선배들은 자연스레 '양 많이'를 주문했는데 냉면에 교양이란 기호가 붙기 이전이었기에, 메뉴판에 없는 비밀 메뉴도 아는 단골이라기보다 그저 잔뜩 주린 영혼으로만 보였다. '양 많이'에 더불어 지글거리는 녹두전도 나왔으니 겸사겸사 소주도 시켰다. 돼지기름에 지져낸 전의 맛은 강렬하고 묵직했다. 웬만한 주먹이라곤 들어가지도 않을 샌드백의 느낌이랄까. 기름진 녹두전의 그늘에 가려 정작 냉면의 기억은 흐릿하다. 맛있냐? 묻는 질문에 어어, 시원해요. 이런 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선배들 따라 집회도 몇 번 따라가고 길바닥에서 구호도 외쳐봤지만 운동권의 기치는 저문 지 오래였다. 오란다고 농활도 따라갔지만 식량주권 같은 말은 공허하기만 했다. 대신 무릎까지 푹 빠지던 논밭의 뻘이야말로 몹시 사실적이었다. 직접 김 매 보니까 어때? 물으면 어어, 시원해요. 라고 대답했겠지.


맛도 모르고 멋도 모르고 이념은 더 모르던 나는 대신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엿본다. 한참 줄 선 다음 올라가야 하는 이층의 계단참에서 늑장을 부리며 저 깊은 부엌의 김 서린 공정을 훔쳐본다. 팔뚝만 한 원통 모양의 반죽을 기계에 밀어 넣은 다음, 줄줄이 뽑히는 면 다발을 체로 건져 헹군다. 반질거리는 은색의 찬합 안엔 무릎을 치게 만드는 알싸한 맛의 김치 3종 세트가 담겨있다. 오래된 역사는 맛에만 밴 것이 아니라 켜켜이 바른 벽지에도, 붓글씨로 써 액자로 표구한 메뉴판에도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전통의 정도를 남몰래 엉덩이로 감지하고 했다. 키가 작아 언제나 어색하게 남아돌던 의자, 그러나 이곳 냉면집들에선 다르다. 한국인의 평균 키가 지금보다 작던 시절부터 써 온 것이라 그럴까. 의자도 테이블도 내 키에 딱 알맞아 발바닥이 함부로 들뜨지 않고 온전히 착 붙는다. 을밀대도 우래옥도 모두 그랬다. 필동면옥도 을지면옥도 물론이다.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 은은한 전통을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하다는 냉면집들엔 다들 전설 같은 일화들이 서려있었다. 남쪽으로 피난을 와서 어떻게든 가진 기술로 정착하느라 애를 쓰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쩔 수없이 내가 가장 잘 아는 북녘 사람, 백석을 떠올린다. 당연히 안부를 물으며 반가워할 수 없는 사이니 대신 그의 시를 읽었다. 제일 좋아하는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아니고, '흰 바람벽이 있어'도 아니다. 이 시들은 술 취한 혀로 열심히 낭송하기도 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는 그리 읊은 적 없다. 혼자 속으로만 좋아했다. 그 시의 제목은 <국수>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날여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나의 뿌리는 모두 남녘 바닷가 근처라 저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맛을 알지 못한다. 저 시원이 내가 아는 시원한 맛일까?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향의 이야기를 고향의 말로 당당히 써 내려간 기백은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백석은 백석의 스타일이 있었던 거다. 어디에 주눅 들지 않고 누구에 꿀리지 않는 자기 스타일이.


그러니 온 세상이 자꾸만 뒤집어지는 요란한 전쟁통, 살 길 찾아서 떠나온 사람들이 물 설고 낯도 설은 땅에 당도해 자기들의 음식을 만들어 낸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투도 다르고 요리 재료도 다른 곳에서 무엇보다 간을 보는 입맛도 다른 사람들 앞에 '여기,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시오.' 하고 내어팔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다. 많은 부침을 겪으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것은 또 어떻고. 고로 지금도 입구 한 켠의 이북5도 신문철이나 벽에 걸린 흑백 사진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여기엔 세상이 뒤바뀌는 사이에도 주눅 들지 않고 꿀리지 않는 스타일이 있다. 타협하지 않고 영합하지 않는 지점, 나는 여기에 매료된다. 그래서 더운 여름이면 땀 흘리며 줄을 서고, 추운 겨울엔 손을 호호 불며 줄을 선다. 이게 나만의 냉면인 셈이다.


메밀 반죽을 만져온 사람들을 생각하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작은 도시락 가게 떠올린다. 말투도 다르고 요리 재료도 다르고 간을 보는 입맛은 물론이거니와 생긴 것도 모조리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요리를 내어놓을 민아 언니를 생각한다. 요리를 전공하지도 않았으며 가게를 차려보지도 않았던 사람.  묻은 행주와 묵직한 냄비, 강한 화력의 화구와는 아주  세계에서 숫자만 가지고 일했던 사람. 도마  양파 대신 커다란 단위의 숫자를 쪼개고 나누던 사람. 그러나  민아 언니가 종종 차려주던 밥상을 기억한다. 두부와 버섯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된장국과 새싹잎과 견과류를 올린 샐러드, 귀한 김치  넣고 끓여낸 김치찌개와   아닌  같은데 은근히 생각나던 멸치볶음과 계란말이도. 정갈하게 차려낸  밥상을 생각하면 새로운 도전과 시작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길게 길게 이어질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다시 마주할 테이블엔 어떤 요리와 이야기들이 올라올지 상상부터 황홀하다. 따끈한 접시를 나누고 차가운 술을 곁들이고, 그게 어쩌면 우리의 스타일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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