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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r 12. 2022

견디기 어려운 침묵

어둑한 방에 누워서 웃옷을 걷어 올리고 배위로 미끄덩 거리는 물체의 움직임을 느끼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가만히 누워 내 배위의 물체를 조종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쓰~~ 흐읍…”

이 사이로 바람을 들이마시며 뒤 이어 입술을 다무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머리를 갸우뚱하는 움직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저건 이상 신호가 발견되었다는 뜻이 분명하다.

“딸깍 딸깍 쓰윽쓰윽”

마우스가 움직이고 눌리기를 반복한다.

나는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어서 무슨 말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우스만 딸깍거리고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에서 복부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초음파 프로브가 움직이는 그 수십 초가 몇 시간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왜요? 뭐 이상한 게 있어요?”

불안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물어본다.

“아, 아니요. 이게 잘 안 잡혀서요.”

허망하리만치 경쾌한 대답을 들으며 다시 마음을 달랜다.


걱정이 많은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언제나 약자이다. 검사 후 결과를 들을 때까지 오만가지 상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데, 결과를 말해주는 사람과 마주한 순간부터 답을 듣는 그 수십 초간 불안한 상상은 극에 달한다.

가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만 줄여도 내 건강이 훨씬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지만 별 것도 아닌 검사를 받고 결과에 마음 졸이는 긴장은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질 않는다. 아마도 성격이 밑바닥부터 통째로 뜯어고쳐지지 않고서는 죽을 때까지 이 우스운 짓거리를 반복할 것이 분명하다.




단순한 검사에도 이렇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양 가슴을 두근거리며 의사의 반응을 살피는데, 뱃속에 생긴 혹의 정체를 알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던 몇 년 전의 검사는 잊을 수 없는 긴장의 시간이었다.

회사에서 해주는 건강검진에서 난소에 물혹이 있으니, 3개월 후에 초음파를 한번 더 해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난소 물혹은 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불안하지 않았고, 3개월 수에 다시 한번 검사나 받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이어리에 검사 일정을 동그라미 쳐 놓았다.


3개월이 지나 회사 근처 산부인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일이 조금 일찍 끝나는 날이었고, 마침 근처에 산부인과가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갔다.

“건강검진에서 난소 혹이 있다고 했는데요. 3센티미터 정도 된다고 했고, 추적검사해보래서 왔어요.”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닌데 증상은 꼭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여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 선생님이 내 얘기에 집중을 못해 증상을 놓칠지 모른다는 황당한 걱정 때문이다.

듣는 둥 마는 둥 검사에 들어간 선생님의 얼굴을 역시 뚫어져라 쳐다본다.

‘난소에 혹이 있고, 사이즈는 그대로네요. 6개월 후에 다시 오세요.’

이것이 내가 상상한 모범답안인데 선생님의 반응이 내 예상과 달랐다.

“쓰~~ 읍…” 역시 예의 그 불안한 반응이 나왔다. 고개까지 갸우뚱한다.

“난소가 아닌데…. 뭐지......?”

난소가 아니면 뭘까. 또다시 나의 상상은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다.

“혹이 생각보다 큰데…. 15 센티미터면……”

사이즈를 재고, 또 재고, 쓰으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를 여러 번.


결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약 15 센티미터 크기의 혹이 복강 어딘가에 존재하며, CT를 찍어 적확한 위치와 원인을 파악해 봐야 한다고 했다.

중병을 선고받기라도 한 듯 손을 떨며 병원에서 나와, 원래 다니던 대학병원 산부인과 진료를 예약했다. CT 검사를 받고,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까지 오만 가지 상상으로 나와 남편을 괴롭혔는데, 그날들을 생각하면 내 옆에서 묵묵히 살아주고 있는 남편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CT 결과가 나오는 날 또다시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대학병원 산부인과는 갖가지 환자들과 함께 고위험 산모들이 많아 소란스럽고 의사도, 간호사도 부산하다.

그래서 보통 의사 선생님과 대면하는 시간이 1분을 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화면을 여러 개 띄우고, 이 사진을 봤다가 저 사진을 봤다가 하며 창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어 동그란 바퀴 의자에 올려놓은 엉덩이를 몇 번이나 들썩 거렸다. 그 와중에도 긴장하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일까 봐 떨리는 손을 꽝 움켜잡고 있었다.

이미 다 확인한 결과일 텐데 뭐가 저렇게 오래 걸릴까, 혹시 이전에 못 봤던 뭔가가 사진에서 보이는 건 아닐까, 나에게 말해주기 어려운 어떤 결과가 나온 것일까.

약 20초간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산부인과 관련 병명과 함께 앞으로의 인생 역정을 수십 가지 상상해보았다. 가족들과 회사와 아이와 남편과 친구들에게 해야 할 말들이 놀랍게도 한 번에 떠올랐다. 그 조용했던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떠올린 혼자만의 시뮬레이션을 글로 적어보라면 열 페이지는 나올 것이다.

불길한 상상으로 터질 것 같은 머릿속과는 반대로 진료실은 너무 적막했다. 내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의사의 마우스가 움직이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다 못해 귀에서 삐~하는 이명까지 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옆에서 들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강하게 박동하는 내 심장소리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음.. 암은 아닌 것 같아.”

“하……”

의사의 대답에 튀어나온 내 한숨소리가 너무 크고 드라마틱해서 나중엔 조금 부끄러울 정도였다.

“좀 특이한 경우라 다른 선생님들 의견도 들었고, 그냥 지난번 수술 때문에 생긴 유착으로 인한 물혹일 가능성이 높아. 혹이 크니까 수술을 해야 되고, 수술하면서 조직검사를 같이 해보지 뭐. 너무 걱정하지 말고.”

며칠간의 고민과 침묵의 시간에 너무 많은 상상을 해서인지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까짓 물혹 제거 수술쯤이야 즐겁게 받아버리지 뭐.


일주일 안에 수술을 했고, 조직검사 결과 역시 암은 아니었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은 물혹이었지만 다시 생길 수 있으니 역시 추적검사를 하라고 했다.

그 후 아쉽게도 혹은 재발했고, 지금도 6센티미터 정도의 혹이 복강 내에 있다고 한다. 사이즈가 커지면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가고 있지만 이제 그다지 걱정스럽지 않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 산부인과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하니까 미리 관리한다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병원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건 내 이성적인 생각일 뿐이고, 병원에 갈 때마다 검사 결과를 듣기 전 몇 초간의 적막 속에 나의 걱정과 상상은 매번 반복된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늘 내 긴장이 한심스러워 웃음이 나오지만 이건 통 나아지질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마음도 한번 정리했으니 다음번 검진 때는 조금 더 초연해 지기를 바라본다.





** [정여울의 에세이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과제로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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