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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11. 2023

#14. 빠질 수 없어. 노안 얘기

나만 겪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

노안은 갑자기 온다.

버튼이 딸깍 눌리듯이 어느 날 갑자기.

40대 중반에 들어서면 마치 자격이 주어지듯 너도 나도 노안 바운더리에 들어온다.


시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불편함이다. 한 곳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다른 먼 곳 바라보면 카메라 초점이 흐려지듯 시야가 부옇다. 조금 기다리고 나면 서서히 초점이 맞춰져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내 주변에는 이 증상이 나타나 안과에 문의를 해보고 노안임을 깨달은 사람이 많다.



동년배들과 회사를 오래 다니다 보니 함께 늙어가며 서로의 늙음을 관찰한다. 이십 대에 회사에 들어와 연애사를 상의했던 동료들이 이제는 모이기만 하면 혈압과 공복혈당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건강식 사이트를 공유한다.



지난주 탕비실 수다의 주제는 노안이었다.

"저 진짜 눈이 잘 안 보여요. 안경 써야 할거 같은데 아, 쓰기 싫어."

"어, 나도 회의할 때 화면 안 보여. 난 라섹한 지 십 년 넘어서 이제 수술효과도 떨어져서 더해."

"저는 애 약 먹이려는데 설명서가 안 보여서 사진 찍어가지고 확대해서 봤어요."

"나는 그거 옛날부터 그랬어. 사용자 설명서 작업할 때도 사진 찍어서 확대하고, 멀리 있는 간판도 사진 찍어서 확대해."

"와, 그거 아이디어네요. 사진 찍으면 되는구나. 나도 그렇게 해야지."


얘기 중에 자잘한 아이디어가 공유되는 유익함도 발생한다. 화려한 영상으로 우리의 눈을 빨리 망가뜨리는데 일조했던 스마트폰이 그 스스로는 무한히 발달하여 이제 우리가 물리적으로 볼 수 없던 영역까지 넓혀서 보여주는 아이러니를 만들기도 한다.


"나는 다초점 써야 할 상황인데 버티고 있어. 그것만은 내가 오십 이전에 안 쓸라고. 근데 안경 맞출 때마다 자꾸 다초점 쓰래. 짜증 나게."

"흐흐흐흐 다초점은 자존심이에요. 일단 버텨야 돼요. 그래서 예전에 김 부장님 보면 안경 머리띠처럼 앞머리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했잖아요. 그렇게 되는 거죠. 뭐."


"저... 노안 말씀하시는 거죠?"

"어?... 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던 옆 팀 김차장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어 모두가 조금 놀랐다.

이것은 사실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김차장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과 사사로운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일에 대한 것 말고는 거의 얘기하지 않고 말을 걸어도 조용히 웃고 지나가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커피 내리면서 한참을 서서 우리 대화를 들었던 거 같다.


"저도 죽겠어요. 진짜 안 보여요. 안경을 써도 안 보이고 벗었다 썼다 하기 귀찮아 죽겠어요."

"하하. 김차장님도 그래요? 다초점 해야 돼요. 다들 다초점 안 해서 불편한데 아마 몇 년은 안 하고 버틸걸요."

"눈이 피로해서 다초점 해야 할거 같긴 해요. 이제는 책도 예전처럼 오래 못 보겠고......"


커피를 들고 우리 옆으로 온 김차장은 노안의 서러움과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토로하고 갔다.


이십 년을 한 곳에서 근무했어도 공감대를 느끼지 못하며 데면데면했던 김차장,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한참동안 대화하게 만드는, 그게 노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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