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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12. 2023

#15. 불안과 싸웠던 오랜 노력들

믿고 가는 길에 형통함이 따릅니다.

런 종류의 불안을 처음 느꼈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하는 가 어렸던 나이는 열한 살 때였다. 왜 그 나이가 또렷이 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날 열한 살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던 초저녁 무렵,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집안까지 시끌시끌했다.

나는 나가서 놀고도 싶었지만 혹시 재밌는 게 나오지 않을까 기 되어 텔레비전을 이것저것 돌려보고 있었다. 화도 드라마도 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는지 재밌는 건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피부가 많이 상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거의 멀쩡한 부분이 없을 만큼 피부가 붉게 뭉개져 있었다. 어떤 아이는 부모 품에 안겨서 눈을 반쯤 감았는데 이미 죽은 아이의 영상 같았다. 무서운 마음이 들어 끄고 싶었지만 저게 뭔지 모른 채로 끄면 마음이 더 심란할 것 같았다. 무서워도 계속 봤다.

그건 후천성 면역결핍증, 에이즈에 대한 정보 프로그램이었다.


에이즈에 일단 걸리면 약이 없다는 것, 아이들도 걸릴 수 있다는 것, 걸리면 저렇게 피부가 변하면서 죽게 된다는 것. 그것만 알 수 있었다. 

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고 숨이 가빠졌다. 더 이상 보는 것이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끄고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엉덩이 들썩이게 만들었던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멀리 사라져 가는 효과음처럼 아련했다. 아이들 사이에 으면서도 방금 봤던 영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공포심에 손하나 까딱할 수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



이것이 질병과 건강에 대한 내 첫 불안의 기억이다. 나중에 자라서 에이즈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습득하고 두려움이 사라지긴 했지만 에이즈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때 그 열한 살 때 TV앞에서 굳어버린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불안이 강한 성향을 가진 것 같다. 모든 열한 살들이 그런 영상을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삼십여 년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가슴 한편에 늘 불안을 품고 종종 내 안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살았다.

내가 병에 걸릴까 봐, 가족이 병에 걸릴까 봐, 그것을 걱정한 시간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많다.  현재를 훼손하면서 더 집중해서 살아야 하는 많은 시간들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만큼 내게는 그 불안과 싸우려는 노력시간도 많았다.

크고 작은 불안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 속에 파묻혀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많이 괴로웠고, 나를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오지 않은 미래의 불행이 생생해서 식은땀이 나거나, 사랑하는 아기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내 미래가 불안해서 눈물 나는 날,


그럴 때 가장 먼저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다른 사람이 했던 긍정의 말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좋은 말이 많이 쓰인 책을 골라서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계속 읽었고, 인터넷이 발달한 후에는 명언과 긍정문을 끊임없이 주워 모아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 것들은 너무 흔해서 아무 효과도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너무 흔하다는 건 누군가 많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을 오랜 시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사람들은 가끔 의외의 것들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유치한  광고문구가 딱 내 상황에 들어맞을 때도 있고, 허접한 삼류영화 한 소절이 동동거리던 불안을 잠재우기도 한다. 그런 것들은 사주팔자처럼 언제 나와 만나는지도 중요해서 허구한 날 집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오래된 책이 마침 딱 어떤 날 손에 잡혀 마음의 치료제가 되어 줄 때도 있다. 몇 년 후 다시 읽어보면 대체 어느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던 건지 찾을 수 없어 어처구니가 없다.



오늘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문득 책상을 내려다보니 내가 오려놓은 문구들이 보였다. 사무실에서 십여 년을 사용한 내 책상은 유리로 덮여있고 그 유리 아래로 얇은 종이를 끼워 넣을 수 있다. 나는 불안을 잠재우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문구들을 만날 때마다 인쇄해서 유리 밑에 끼워두었다. 어떤 종이들은 십오 년이 넘은 것도 있다.


매일 읽지도 않았고, 넣어놨다는 사실을 잊은 것들도 있지만 가끔 이상하게 눈에 띌 때있다.

오랜만에 읽으면 처음 읽었을 때와 똑같이 마음을 울린다.



오늘 눈에 띄었던 글은 언젠가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받았던 글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내가 오늘 위로하고 싶었던 사람에게도 힘이 되기를.


하이에나의 웃음소리
먼 언덕에서 하이에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사악하고 사악한 여자의 웃음소리 같다. 하하하.
하이에나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았다.
왜냐고? 그놈들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이에나들이 사람을 해치러 마을로 오지는 않는다.
신의 손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니 모두가 안전하다.
내일 일도, 어제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와리스 디리의 <사막의 새벽> 중에서-

*살다 보면 하이에나의 웃음소리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 음산한 소리만으로 지레 겁을 먹고 걱정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심지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포기를 해 버리기도 합니다. 먼 언덕에서 하이에나가 웃건 말건 나는 나의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믿고 가는 길에 형통함이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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