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춘 Apr 28. 2024

40대, 잃어버린 통잠을 찾아서..

수면장애 극복 & 소거로 찾은 자유

 '멜론메이커'

블루베리 두 개가 만나면 딸기, 딸기 두 개는 귤, 귤 두 개는 레몬, 같은 과일 두 개가 합해져 점점 큰 과일이 되고 마지막으로 수박이 만들어지는 게임이다.

처음엔 중구난방으로 과일이 쌓여 수박까지 가지 못했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이제 수박은 너끈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대로 게임이 끝나버리면 좋겠는데 이후에도 이어진다. 더 노력하다 보니 수박 두 개를 만들 수도 있고, 그 수박 두 개가 만나면 두 개의 수박은 터져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 두 번 수박 두 개 만들기에 성공했다. 수박 두 개가 만나 펑! 하고 터지는 쾌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 끊임없이 게임을 반복한다.



작은 박스 안에 수박 두 개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늘 수박을 한 개 밖에 만들지 못한 채,  게임 오버가 된다.


하지만 게임은 친절하게도 플레이어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 약 30초간 광고를 보고 나면 망치 아이템을 준다. 이 망치로 망한 판에서 과일 한개를 때리면, 때린 과일이 소거되고 게임은 이어진다.


이때 어떤 과일을 깨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같은 과일 사이에 끼어 과일들이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작은 블루베리를 깨 보기도 했고, 커다랗게 의미없는 자리를 차지한 파인애플이나 멜론을 깨 보기도 했다. 몇 번이나 해봤지만 뭘 깨도 판세가 뒤바뀌지 않았다.


망치아이템을 제대로 써먹고 싶어 바짝 약이 올랐던 어느 날, 과일로 가득 찬 박스를 노려 보다가 작은 탄성을 질렀다.


승부수는 수박이었다.

아깝지만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며 다른 과일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수박을 깨야만 다시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가장 아꼈던 수박을 깨고 나자 넓은 공간이 생겨났고, 수박 위에 쌓여있던 과일들이 서로 만나 시원하게 펑펑 터졌다.


판을 뒤바꾸려면 큰 것을 포기해야 한다. 큰 것이 소거되어야 판세가 뒤바뀐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작은 것들에 연연하면 판을 뒤집을 수가 없다.





작년 겨울, 내 삶에서도 커다란 것이 소거되었다.

새벽 3시쯤 되면 잠이 깨는 괴로운 날들이 1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온도변화에 민감해져 갑자기 얼굴에 땀이 뻘뻘 나는 증상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설마 싶어서 혈액검사를 해보니 호르몬의 변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의사는 아직 약으로 갱년기를 다스리기엔 너무 젊다며 감정 기복이 극심해지면 그때 약을 써보자고 했다. 참아보라는 의사의 권유로 마음을 다잡았으나, 낯선 증상들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밤의 허리 무렵에 깨서 다시 잘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괜한 불안에 두근거렸고, 분명 자고 있는데 주변 소리가 들리고 머리가 복잡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치 밤을 새운 것처럼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수면장애가 준 큰 상실은 새벽 5시 기상이 힘들어진 것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즐겼는데 밤에 한번 깼다 잠들면 새벽기상이 불가능했다.

무리해서 일어나면 낮에 일상생활이 힘들었고, 늦잠을 자 버리면 늦게 일어났다는 패배감 때문에 아침을 불쾌하게 시작하곤 했다. 이런 일들의 반복은 무기력과 우울을 가져왔다.

이렇게 몇 개월을 보내고,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수면장애는 갱년기의 대표적 증상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먼저 어떤 불편함으로 깨게 되는지 이유를 찾아보았다.

가장 성가신 이유는 가려움증이었다. 20대부터 가끔 발생하던 지루성피부염이 원인이다. 귀 뒤쪽이나 무릎 안쪽에 피부염이 가끔 생겼는데 마흔이 넘어서면서 조금 더 자주 찾아왔다. 조그만 자극에도 깨려고 준비하고 있던 몸은 어딘가가 조금이라도 가려우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발딱 깨웠다. 그렇게 긁고 나면 잠은 달아나버리는 것이었다. 낮에는 심하지 않아 치료를 미루고 있었는데, 이 약간의 가려움이 밤잠을 방해하는 원인이라 생각되어 당장 치료를 시작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열심히 바르고 무지막지한 보습을 해 주었다. 그렇게 몇 주 지나자 피부염은 말끔히 나았다.


갑작스럽게 더워져서 깨는 것도 대책이 필요했다.

시도 때도 없이 뜨거워지는 등과 얼굴은 냉수를 마시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가라앉다. 밤에 깨더라도 바로 가라앉힐 수 있도록 잠자리 옆에 찬 물을 떠 놓았다. 더위가 들이닥치면 눈도 뜨지 않고 물을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커피는 아침 10시 이전에 한잔만 마실 것, 잠자리 들기 전에 스마트기기 보지 않,  시원한 재질로 이불 바꾸기. 

일련의 방법들이 조화를 이뤄 수면장애가 조금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유 없는 불안이랄까, 두근거림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새벽 3시의 불면은 줄어들었지만 선잠을 자는 통에 낮시간의 피로와 무기력은 계속되었다.


수면장애로 인한 저품질 생활을 바꿀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 고민한 끝에 나는 답을 찾아냈다. 나의 숙면을 방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숙면을 통해 얻고 싶었던 새벽기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싶은 그 마음 때문에, 중간에 자꾸 깨는 것이었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나의 의지가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판을 바꾸기 위해 깨야할 나 가장 큰 수박, 새벽기상을 소거했다.

새벽기상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일 뿐임을 깨달았다. 내 하루를 의미 있게 시작해주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던 시간. 한때는 소중했던 새벽기상 자체가 하루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이제 올바른 수단이 아니었다.

과감하게 그 수단을 없애고 딱 출근 준비만 할 수 있는 7시로 알람을 맞췄다.


신기하게도 그 후 오밤중에 깨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에는 슬며시 눈이 떠져 시계를 보면 거의 정확히 3시여서 짜증이 났는데 이제 7시 알람이 울릴 때까지 깨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이 불안을 잠재워 준 것일까.

오랜만에 통잠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아쉽지만 30대에 나의 활력소이자 무기였던 새벽기상을, 이제 쉬어갈 시기가 된 것이다.

사춘기의 질풍노도 같은 이 중년의 혼란이 지나고 나면 다시 밸런스가 맞춰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또 새벽에 일어나 느긋함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해결해야할 고민이 있다면, 당신만의 수박을 찾아 확실하게 소거하시길, 그리고 평온을 찾으시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