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시라와 김상중의 연기가 애틋해서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먹먹했던 드라마 '미망'을 보고 나서, 나는 허겁지겁 박완서의 원작 소설 '미망'을 찾아 읽었다. 드라마와 내용이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태임이 엄마의 비극과 태임의 애틋하고도 어쩐지 서글픈 연애, 전쟁이 개인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주는 고통 등을 드라마에 이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나는 박완서 작가의 팬이 되었다.
대학에 가서 나의 전공과 아무런 상관없는 문예창작과의 수업들을 찾아 들으며, 문학이라는 넘지 못할 세계를 동경했다. 그리고 나의 재능 없음에 늘 절망했다. 수업시간에 읽어오는 것이 숙제였던 박완서 작가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은 경외심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어쩌면 일련의 사건들을 그토록 담담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적어낼 수 있는 것인지, 담백하고 따스한가 하면 대담하고 휑한 것이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며 가슴이 덜컥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잃어버릴만하면 한편씩 작가의 책들을 읽었다.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을,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담뿍 담겨있는 에세이를 읽을 때 작가와 가까워지는 희열을 느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사람, 나만이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작가를 사모했다.
그렇지만 나목은 끝까지 읽지 못했었다.
한두 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첫머리를 읽기도 했고, 서점에서 들춰보기도 했지만 끝까지 읽지 못했다. 전쟁, 미 8 군 PX라는 화려하고도 서글픈 무대, 가족의 죽음을 겪은 고택이 주는 쓸쓸함이 싫었다. 작가의 다른 책에도 전쟁과 PX에서 일했던 경험담이 있었고,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나목을 읽기 시작하면 그 슬픔에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작가를 사랑하여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사 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하면서 그 문장들을 음미해왔다. 그리고 작가의 부고를 읽을 때는 조금 울었다.
지난해 말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소설책을 참 좋아하는데 요즘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이 어쩐지 서글퍼졌다. 다시 소설을 읽는 날들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들의 리스트를 적어보다가 자연스럽게 '나목'을 적게 되었다. 어떤 다른 자극을 만난 것도 아닌데 그냥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나목'이 생각났다.
그리고 또 조금 잊고 있다가 지난주에 책을 주문했다. '나목'은 워낙 오래되고 유명한 책이라 여러 출판사의 다양한 버전이 있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이 붙어있는 책을 선택했다.
책을 사놓고 한참을 앞뒤로 훑어보았다. '오늘의 작가 총서' 중 하나였다. 한동안 이문구 작가의 책을 찾아 읽던 날들도 생각이 났고, 살아보지도 않은 해방 후, 전쟁 후의 쓰라림에 내가 왜 그리 집착하고 가슴 아파했는지 의문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제오늘 나목을 읽고 나서 목울대가 아픈데 울 것까지는 없는 이 기분이 주체가 되지 않아 조금 더 서글퍼졌다. 그다지 슬프지도 않은, 아무것도 아닌 오래전 기억들이 한편씩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쪽이 싸하게 두근대는 먹먹함 같은 것이었다.
나목을 읽는 동안 수십 년간 간간히 보아왔던 작가의 작품들을 하나씩 훑어보는 것 같았다. 그의 인생과 사람들과의 인연, 생각, 문장, 당돌함, 따스함과 담백함이 모두 느껴져 너무 소중했다.
PX에서 근무했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은 에세이에서 전쟁의 참담함과 어딜 가나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듯한 슬픔 속에서 조금이나마 비춰 드는 햇살을 누리고 싶은 안달스러운 마음과, 어린 아가씨를 보는 주변 사람들이 느꼈던 서글픈 싱그러움을 묘사했던 글들이 떠올랐다.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잠시 꺼내놓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갑지 않지만 아늑하고 평온한 남편을 만나 결혼한 이야기, 시어머니에 대한 과하게 정겹지도 불만스럽지도 않은 솔직한 마음들도 기억이 났다.
어쩌면 사람 마음을, 나도 꼭 그렇게 느꼈던 그 감정을, 이렇게 환히 들여다보고 자기 말로 번역이나 해준 것처럼 알알이 적어낼 수 있는 것인지. 작가의 능력에 몸서리가 쳐질 만큼 질투가 나면서도, 동시대에 그 글을 읽었던 내가 대견하고 이런 작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만 주어진 선물인 것처럼 우쭐하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과 젊었던 시절들의 이야기가 있는 두 권의 에세이를 오래전에 읽어두었던 나를 칭찬했다. 그 글들을 읽고 나서 '나목'을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빠들의 죽음을 묘사하는 구절들을 차분히 읽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안타까워서 내용만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빨리 읽고 그냥 책장을 넘겨 버렸다. 아직 그걸 읽을 만큼 마음이 다부져지지는 못했나 보다. 오빠도 없으면서 단단하게 젊고 밝은 오빠들의 기억이 나의 기억인 양 마음이 아파서, 죽음의 장면은 읽지 않고 누가 말해주고 넘어갔으면 싶었다. 주인공이 그 기억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과정을 읽으며 내 마음도 달랬다.
결국 해피엔딩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해피앤딩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내내 안쓰러웠던 태수와의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인조속치마를 끌어안고 있던 태수가 불쌍해서 뜬금없이 눈앞이 흐려졌었는데 보상이라도 받은 듯 다행스러웠다.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주인공의 불안함과 열정이 태수라는 현실의 틀 속에서 꼭꼭 눌려지는 것이 하나도 답답하지 않았다.
전쟁을 겪는 동안에는 모든 끝이 바로 앞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 것도 같았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와 자식 따위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틀 일 뿐 죽음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그 회색 속에서 태수는 고개를 휘저으면 다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우울과 두근거림을가지고 있는 사람은, 깊은 고뇌 따위는 먹고사는데 사치라고 생각하는 안정적인 사람과 연을 맺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옥희도 씨의 유작전에 간다는 뻔뻔하게도 솔직한 아내를 따라나설 만큼 착하고 단순한 사람과.
다이아나 김을 조금 더 따스하게 대해 줬으면, 태수를 조금 덜 비참하게 만들어줬으면, 옥희도 씨의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내 마음이 조금 덜 쓰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건 아니지, 위선이지, 솔직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렇게 하는 편이 후련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소설 속에서 그 시절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낄 때마다 가슴이 아린 기분을 조금 즐긴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안도하면서도 자꾸 들춰보는 것은 그 아릿한 아픔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 때문이겠지.
작가의 이야기였는지 소설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 '그 남자의 집'을 읽을 때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슬픔을 어찌나 담담하게 그렸는지 마음이 아팠는데 '나목'에는 그보다 더 짙은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전쟁의 처참함 속에서도 미치도록 생동감을 느끼고 싶은 젊음이 목말라하는 모습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힘없이 쓸려 없어진 작가의 대학생활, 젊은 날들에 대한 동경도 담겨있을 것이다.
언젠가 작가의 작품 중에서, 사고로 자식을 잃은 사돈이 한 집에서 남겨진 손주들을 키우며 사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안사돈과 바깥사돈이 한집에 사는 것을 보고 남사스럽다고 뒷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알고 보니 뼈아픈 사연이 있다는 내용인데, 그 가슴 아픔이 너무 깊이 묘사되어 있어 사람들이 있는 회사였는데도 글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었다. 아들을 잃은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려니 혼자 생각했다. 안 그래도 서늘한 그의 글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부터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이 작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겠지. 오히려 말년의 글들을 읽으면 그 아픈 기억들이 모두 작가에게 녹아들어 가 이제 기복 없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따스하고 평온했다.
모처럼 소설을 읽고 나서 작가가 많이 보고 싶어 졌다. 왜 살아생전에 이런저런 행사에서 한 번쯤 얼굴을 뵐 수도 있었을 텐데 시도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기도 했다.
마음이 먹먹할 만큼 사랑하는 작가의 첫 작품을 이제라도 끝까지 읽게 되어 다행이다. 박완서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고 평생 간간히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