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로르롱 / 진인진
강렬한 주제를 아주 잘 표현하는 매우 잘 만든 책 표지다. 예속을 벗어난 흑인 노예들이 기뻐하는 역동적인 자세와 대비되는 백인들의 고상하고 자애로운 모습은 책의 주제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볼수룩 거북하다.
표지 그림은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제 폐지를 그린 역사화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 원시축적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감안하면 노예제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노예제와 같은 강제적 예속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로르롱은 자본이 코나투스 Conatus의 포획, 즉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연적 활동력을 정신적 지배와 욕망의 일체화하여 노동자가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여기도록 정서적으로 종속시킨다고 한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욕망 장치를 통해 고도로 구조화된 종속 장치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종속된다. 따라서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에 의한 전인격적으로 구속되는 노예와 자발성을 가장한 정서적 종속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에 묶인 노동자는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 그림 자체에도 강한 반감이 있다. 영국에 이어서 프랑스가 식민지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법제화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과정은 그림처럼 평화롭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티 Haiti는 독립의 대가로 정부 예산의 80%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프랑스에게 100년도 넘게 지불했어야 했고, 그 결과 21세기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벗어나지 못했다.
책 내용과 역사적 맥락을 배제하고 본다면 잘 만든 표지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표지를 본다면 펄쩍 뛸 거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인인 저자는 분명히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했던 일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노예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표지는 매우 잘 만든 망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