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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Feb 18. 2024

당신이 잠든 사이에

서울 집을 완전히 빼면서 애인과 장거리 연애가 시작됐다. 앞섰던 걱정과 달리, 최근 한 달은 사랑이 조건보다 태도의 문제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주말마다 2박짜리 짐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내려오는 애인은 평일에도 종종 세종으로 퇴근했다 동트기 전 서울로 출근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다. "내가 너보다 체력이 좋잖아." 미안해하는 내게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난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건 '사랑'이 아닌 말로 설명될 순 없는 일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서로에게 닿고 싶어 하는 우리 사이도 덕분에 흐트러짐 없을 수 있다고.


서울에서 일을 끝낸 애인이 같이 저녁을 먹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자며 내려온 날이었다. 장거리 운전으로 지쳤을 몸에 술까지 들어가자 그는 영화를 보던 중 그만 곯아떨어졌다. 잠을 깨겠다며 TV 앞에서 체조를 하다 다시 침대에 기대 누운 지 10분 만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스쿼트를 하던 조금 전 모습이 떠올라 웃기다가, 내일 또 운전해 올라가야 하는데… 안쓰럽다가, 강아지를 닮은 동그란 코나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이 귀엽게도 느껴져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사랑한다고 소곤거렸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사랑을 고백하고 나면 난 좀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으로 뱉어내는 순간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 같다. 내 작은 가슴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혼자만의 감상에 빠져 애틋해지려는데 코를 골던 애인이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아도 아앙애.."


사랑이 만질 수 있는 거라고 믿게 되는 순간이 있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고, 손으로 쿡쿡 찔러볼 수도 있는 거라고. 내게 그런 순간들은 자주 '잠'과 관련된다.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챌 때, 이불을 고쳐 덮어주는 손길을 잠결에 느낄 때, 잠든 새 날 위한 요리를 해놓았을 때, 그리고 잠결에도 사랑에 응답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을 때. 그럴 때마다 사랑은 의심이 파고들 새 없이 단단한 무언가로 우리 사이에서 만져진다. 내게 달려오느라 고된 얼굴로서 눈에 보이고, 잠결에 뭉개지는 발음일지언정 귀로 들리는 무언가가 된다. 사랑은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이런 소리로 들릴 거라고, 믿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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