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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ug 29. 2021

대추의 마음처럼 사랑하기

다섯 살 대추는 하루가 다르게 말이 풍부해지고 있다. 대추는 내 조카다. 임신이 안 돼 고민이던 언니가 대추 달인 물을 마시고 가져 '대추'라고 불리게 된 아이.


아이들에게 대단한 표현 욕구가 있다는  대추를 보며 알았다. 말을 트기 시작할 무렵 대추는 정말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아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길 가다 새로운  발견하면 작은 손가락을 엉성하게  “이게 뭐야?”라고 묻고, 같이 밥을 먹을  내가  숟가락  때마다 “맛있어?”라고 묻는 식이다. 저것의 정체가 뭔지 내가 밥을 맛있게 먹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절반쯤. 나머지 절반은 그저 말을 계속하고 싶은 걸로 보였다. 저도 말을   알게 됐다고 잔뜩 신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부풀어 오르곤 했다.


아이들은 서운할 정도로 빠르게 큰다. 매일매일을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아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주 오랜만에 만난 대추는 훌쩍 자란 키만큼이나 말도 많이 늘어서 자기가 ‘아기’였을 때 주사를 맞고 조금 울었다고 회상할 줄 아는 아이가 돼 있었다. 그러면서 대추는 “이모는 어른이니까 울면 안 된다”며 주사가 무섭다고 하는 나를 점잖게 꾸짖기도 했다.


어른들과 제법 대화를 주고받을 줄 알게 된 대추가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건 바로 사랑이다. 오랜만에 만나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면 대추는 두 손을 쫙 펴고 "나도 열(10)만큼 보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내가 "이모는 열이 아니라 백(100)만큼 보고 싶었어. 열은 백의 열 배야"라고 하면 "그럼 나도 백만큼 보고 싶었어"라고 대답한다. '백'까지 세지도 못하면서. '배'의 개념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런다. 최고의 애정을 표현해 보겠다고 뜻 모를 말을 흉내 내는 것이다.


올해 여름부터는 대추가 어린이집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써오기 시작했다. 6월 언니의 생일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대추는 불쑥 언니에게 "엄마 생일 축하해요"라고 적힌 편지를 내밀었다고 한다. 검은색 크레파스로 거칠고 불안하게 휘갈겼지만 제법 한글의 형태를 갖춘, 대추 생에 최초의 편지였다. 아직 글을 안 배운 대추를 위해 선생님이 함께 써준 모양이었다. 편지의 오른쪽 구석에는 앙증맞은 하트도 그려져 있었다.


최근에는 대추가 새로 산 식기세척기를 주제로 또다시 편지를 써 언니에게 건넸다. 단정한 글씨가 또박또박 쓰인 걸로 보아 이번에는 아이가 말하는 걸 선생님이 받아써준 것 같았다. 편지의 내용은 “엄마 사랑해요. 식기세척기 좋아. 엄마 설거지 안 해서 좋다”는 것이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며 살림을 도맡아 하는 언니의 일이 줄어든 게 좋았던 모양이다. 자기와 놀아줄 시간이 늘어난 게 마음에 들기도 했을 것이다.



언니가 사진 찍어 보내준 대추의 편지들을 보며 문득 상상해 봤다. 엄마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사랑한다고, 엄마가 힘들지 않아서 좋다고 전하기 위해 선생님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이 작은 아이를. 우리는 오해, 쑥스러움, 혹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오지 않았나.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다섯 살 아이의 마음을 떠올려보려 한다. 말을 배우면 배우는 대로 글을 모르면 모르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는 대추의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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