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시 Aug 15. 2022

스쳐 지나간 당신의 하루가 안녕하기를

메모 앱을 통일하는 작업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흩어져 결코 다시 찾는 법 없었던 기록들을 들춰볼 기회가 생겼다. 다양한 글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책이나 영화에서 본 구절들, 산책하다 문득 떠오른 단상, 꿈에서 본 것들에 대한 기록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엉망으로 분출된 문장... 어떤 건 정말 내가 쓴 게 맞는지 낯설었고 또 다른 건 조금 전에 쓴 것처럼 분명했다.


뭘 제일 많이 썼나 잠깐 궁금했는데 아주 손쉽게 해결됐다. 일일이 셀 필요도 없이 누군가 내게 한 말을 받아 적은 게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했다. 그 어떤 탁월한 책이나 영화보다도, 혼자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보다도, 사람들과 나눈 대화였다. 그게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주고 있었다. 그 말들은 가끔 내게 상처가 됐고 그보다 더 자주 위로와 영감을 안겨줬다.


6년 전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 소라색 스트라이프 셔츠가 찰떡같이 어울려 청량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친구와 함께 우리 카페의 시그니처 연유 라떼를 시킨 그녀는 커피를 받자마자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말했다. "와 정말 맛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어요?" 감탄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커피를 마실 때마다 계속됐다. 그녀가 머무는 동안 듣기 좋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나른한 오후의 카페에 부드럽게 울렸다.


좋은 원두를 쓰고 로스팅에 신경 쓰는 걸 알아보는지 커피 맛을 칭찬하는 손님은 꽤 있었지만 그래 봤자 핸드드립 아닌 커피, 특히 라떼의 맛이란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과장이고 주접이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이 하루의 기분을 바꿨다. 그날만큼은 커피를 만드는 일이 보람찼고 전쟁터 같은 일터도 제법 다정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가서는 주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을 가진 그녀의 목소리와 말재주에 대해 일기를 썼다.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이 말의 힘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양수업에서 친해진 남자애의 말도 잊을만하면 종종 떠오른다. 군대에 가있던 걔는 휴가날 연락해 뜬금없이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요즘 읽는 거라며 책의 한 구절을 찍은 거였다. 어쩐지 눈에 익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사회과학 학회를 하면서 읽은 책이었다. "너도 이 책을 읽었어?", 내 물음에 걘 자기가 읽은 다른 책들이라면서 책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마찬가지로 전부 내가 읽은 책들이었다.


알고 보니 걔는 우리 학회 홍보글에 적힌 두껍고도 어려운 책의 리스트, 다소 으스대는 문체로 열거된 그 리스트를 페이스북에서 보고는 전부 사서 읽어봤다고 했다. 공대생인 그 애가 사회과학 책에 재미를 붙이기란 어려웠을 텐데도 그랬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걔는 자기가 알 수 있는 건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라는 것뿐이었다고 털어놨다. 시간이 남아도냐, 왜 이런 괴짜 같은 짓을 했냐고 웃었고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나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했어."


그런 쪽으로 눈치가 없던 내가 그 말이 애틋한 사랑고백이었음을 깨달은 건 그 애와 연락이 끊긴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 뜻을 미처 알지 못했던 그때도 이상할 만큼 마음에 박히는 말이었다. 그날 사진 속에 담아 보낸 그 애의 진심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세월의 풍파에 닳지도 않는 이 말을 오래오래 어루만져왔다.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헤어진 연인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 사람이 잘 되기를 기도한다고. 최근에 나는 미워하는 옛 연인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에 대해 썼다. 그 마음의 맨 처음은 의 말에서 비롯된 셈이다. 사실 걘 어딘가 가벼운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고 그만큼 연애의 기회랄 게 쉽게 주어졌으며,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란 점에서 난 그렇게 여겼다. 저 말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사랑이 많을 뿐이지 매 순간 진심을 다하고 있는 거였다. 걔가 옛 연인들을 위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는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 역시 스쳐 지나간 이름 모를 사람과 친구와 모든 연인을 위해서 두 손을 모아 본다. 한 순간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준, 어쩌면 평생 그리워하게 될지 모를 말의 주인을 위해서, 오늘 하루도 안녕하기를 잠시 기도해 보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느리게 걷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