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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려, 가을아 안녕

캘리그래피 프리즘

아열대 기후가 되었나 보다.

우기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거대한 온풍기를 틀어 놓은 듯 늦더위가 찾아왔다.

잦은 비로 햇빛 볼 날이 없어 사람도 집안도 곡식들도 시들시들하던 차, 덥지만 마침 잘되었다 하고 온 몸으로 반겼다. 


두 손 들어 환영한 뒷 배경에는, 분명 입추도 지났으니 더위가 기승을 부려봤자 이 빠진 호랑이일 테지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며칠 동안 한낮과 한밤의 기온이 쌍끌이 어선처럼 열기를 모아 기세 등등하더니, 모기 입이 돌아간다는 처서를 지내고 나자, 슬슬 저녁 바람에 청량함이 부족하게나마 담기기 시작한다.

매일 똑같이 뜨는 달인 듯 보였지만, 하루가 다르게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면서 가을을 점점 끌어당기고 있었나 보다. 

모두 잠든 사이에 열 일하느라 고생했구나



이대로 자연스럽게 가을로 넘어가면 좋으련만, 아직 복구가 안된 이 땅에 연이어 태풍이 몰아온다. 

들판의 곡식들이 빗물을 털고 태양을 가두고 있는 찰나 또다시 모진 태풍이 눈치도 없이 들이댄다. 

적당히 합시다!  쫌!!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를 중심으로 라이트 훅, 레프트훅을 날린 태풍이 지나니, 더위 내내 밉상이던 초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어디서 효과음을 틀어놓은 듯 귀뚜라미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고, 새벽녘 여름 이불을 밀어내고 두꺼운 이불을 찾을 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8월 31일과 9월 1일은 겨우 하루 차이, 

엄밀히 말하면 눈 한번 깜박이는 차이만큼 붙어 있는데, 느껴지는 온도차가 이리 다르다니.


9월 초입에 서 있으니 기다리던 가을이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짐이 느껴진다.   

1월 말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리고, 2월 3월 광풍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린 가을을 기대했다.

그때는 그저 한바탕 지나가는 폭우일 거라 생각했다. 

가을쯤 되면 해결책이 생길 거야. 그때가 되면 이전처럼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종식될 거라는 근거 없는 막연한 기대감이었지만, 어쩌면 처음 겪는 우리를 다독여주는 불씨였는지 모른다. 

어두운 동굴에서 용기 내어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만드는 한줄기 등불처럼, 곧 괜찮아지니 오늘을 살아가라고, 



기다리던 가을이 왔다. 

무엇하나 나아진 상황이 없어 보이지만, 조심스러운 일상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다시 오는 봄을 기대한다

반년 후 어떤 모습일지 예상할 수 없지만, 다시 사람과 사람이 손을 마주하고 온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대한다.


그런 봄을 맞이하기 위해, 눈앞에 와 있는 가을을 하루하루 온전히 잘 살아낼 것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무엇을 해도 딱 좋은 이 가을에, 저 밑바닥에 잠자고 있는 희망을 부풀려 야무지게 하루를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가을과 겨울이 옹골지게 만들어지면, 

오는 봄은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테지. 

또 다른 시작에 서 있는 우리.


가을아 안녕, 이번엔 특별히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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