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질척거리는
5살의 어느 겨울, 큰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아이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손의 힘이 약해 연필 잡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 어린이집을 땡땡이치고 우리는 겨울왕국을 보러 갔다. 그 당시 대한민국을 사로잡았던 겨울왕국의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물론이고 아이도 정말 즐거워했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그림은 놀랍게도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 이후 나는 아이의 그림 속에서 블링블링하고 어여쁜 드레스를 원 없이 입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귀여운 캐릭터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핫초코와 군계란이 쓰인 그림들도 모두 초등 저학년 때 그린 그림이다. 이 무렵 누군가 아이의 그림이 너무 귀엽다고 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예쁜 것처럼 내 눈에야 당연히 예쁜 그림이지만, 다른 이의 칭찬을 받으니 좋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2 학년 때 그린 크로키 그림이다. 신랑과 잠시 낮잠을 잘 때 아이가 곁에서 쓱쓱 그렸다.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너무 좋아서 지금도 서랍 장위에 잘 모셔두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신랑과 둘째를 그린 그림도 너무 좋다. 공교롭게도 신랑은 그림 속에서 계속 자고 있다. ㅋㅋ 아이는 따로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리고 2018년 가을, 나는 아동문학 부문의 작은 상을 받았다. 얼마 후 지역의 그림책 서점에서 그림책 수업을 했다. 나는 해당 내용으로 콘티를 그렸는데, 그때 수업을 진행한 출판사 편집자님이 아이디어가 좋다고 계속 만들어보라고 독려해주셨다. 나는 내 주변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큰 아이에게 그림을 의뢰했고,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 느낌으로 2019년에 총 32매 분량의 그림책 초고를 완성했다.
이 당시 우리는 그냥 수제책으로 기념 북을 만들 의도였기 때문에 종이도 그냥 일반 도화지를 사용했고, 아이도 색연필로 채색했다. 그런데 원고를 본 신랑은 제본을 해서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고, 당시 합평을 하던 수업의 선생님은 그림책 출판사에 투고해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그 제안들 때문에 나는 점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초고를 다시 디지털화하는 작업이었다.
아이도 순순히 동의했다.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게 아이패드를 샀다. 아이는 동영상만 보고도 프로 크리에이트 프로그램을 잘 다루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아이의 그림을 계속 지켜보았다. 처음엔 작업이 순조로웠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온라인 수업이 생활화되었고 집에서 할 과제들이 많았다. 해야 할 것들이 쌓여가자 아이의 그림 그리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릴 때 큰 아이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내키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본인이 원하면 결과가 좋은 편이다. 코로나가 발생한 기간 동안, 모 그림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해서 상금 10 만원과 트로피와 상장, 그리고 10만 원 상당의 꽃바구니를 받았다. 또 햄버거 회사의 그림대회에서 3등을 하여 10 만원치 상품권을 받은 적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4학년 때 그린 그림책 초고도 아이가 온전히 원해서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엄마가 간절히 원하니 착한 아이 입장에서는 마다할 수 없어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디지털로 다시 수정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점점 더 버거운 짐이 되어가는 듯했다. "00 아, 엄마 그림책 원고는 언제 완성되니" 하고 물으면, "응, 알았어. 조금 있다가 할게." 하던 것이 어느새 묵묵부답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 코로나로 한동안 다니지 않았던 그림책 서점에 방문했다. 여러 이야기와 더불어 예전에 작업했던 그림책 원고 이야기를 했다. 점장이 내게 충고했다. 아이가 4학년 때 그린 그림은 그 시절의 추억으로 마무리하라고 말이다. 지금 이 상태로 디지털화까지 욕심을 낸다 한 들 아이는 이미 시들해졌고, 무엇보다 콜라보한 그림책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것은 엄마의 욕심이 아니냐고.
사실이었다.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것은 내 꿈이지 아이의 꿈은 아니다. 처음 그림책 초고를 그릴 때 아이는 엄마를 돕기 위해 이미 최선을 다했다. 최근에 나는 다시 한번 아이에게 물었다. 정말 더 이상 그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지 않은 거냐고. 이제 우리의 그림책 디지털화는 정녕 안녕이냐고. 아이가 신중하게 생각하더니 답변했다. "응, 엄마, 사실은 나 그리고 싶지 않아요..."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했다. 포기할 결심을.
더 이상 아이에게 그림책 원고로 질척거리지 않겠다. 그림 똥 손인 내가 지난 일 년간 연습하여, 약간의 그림이나마 그리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직 내게 남은 시간은 많다. 더 연습하면 퀄리티는 높지 않겠지만, 내가 직접 그릴 수도 있다. 이미 초고는 있다. 그 그림을 바탕으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채색해 보자. 부족한 색감은 아들의 조언을 받자. 진작에 그렇게 할 것을. 성적 대신 그림으로 질척거린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p.s.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질척거릴 거 같다. 여전히 내 눈에는 내 아이의 그림이 가장 사랑스럽기에 말이다.
*2024년 1월 추가 덧글 : 질척거리던 끝에 결국 아이와 계약을 했다. 지금 아이는 출판사에 새로 투고할 샘플 그림을 그리고 있다.. 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