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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스푼 Nov 11. 2022

커알못입니다만...

그 마음이 예뻐서




블랙커피를 마셨다.


며칠 전 산 작은 커피박스 안에 아직 18개의 믹스커피가 남았다. 나는 원래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입안에 맴도는 그 씁쓸한 맛이 싫었기 때문이다. 고 3 때 친구들이 자판기 커피를 수혈할 때도 나는 율무차나 유자차만 마셨다. 그런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을 낳은 이후다.


노산이라 모유수유에 실패했다. 건강검진을 하고 갑상선 기능 저하 진단을 받았다. 회복될 줄 알았는데, 지금도 아침마다 약을 먹는다. 약으로 갑상선 수치를 유지하면서 둘째를 낳았다. 아이에게 꼭 동생이 있길 바랐다. 외동이라도 그리 외롭지는 않았지만... 무튼 내 마음이 그랬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을 돌보느라 동동 거리다 보면 얼굴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온몸의 진이 다 빠진 듯했다. 힘을 내기 위해 자양강장제를 마시기 시작했다. 비타민이 들어간 제품을 마시면 3-4시간 정도 몸에 힘이 솟았다.


비가 내리면 몸이 더 처졌는데, 그럴 땐 더 강한 타우린이 포함된 제품을 마셨다. 그럼 최소 5-6 시간은 쌩쌩했다. 그리고 위장병을 얻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자양강장제를 끊고 식사를 제대로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믹스커피 한 잔을 얻어마셨다.


온몸에 별이 반짝였다. 이게 커피의 힘이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 오전에 한 잔, 오후에 한 잔을 마셨다. 믹스커피의 달달함이 나를 움직였다. 다시 건강검진을 했다. 하루에 믹스 커피 두 잔을 마신다는 이야기에 의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중성지방 최고 수치였다.


그 이후 집에서 믹스커피를 치웠다. 커알못이라서 대체로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마신다. 아주 가끔 드립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물론 한잔 만이다. 다행히 아이들이 자라 더 이상 얼굴의 땀이 솟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은 정말 미치도록 믹스커피가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다.


비가 내리는 날이나 바깥 활동을 많이 한 날에는 더 영락없다. 믹스 커피의 향이 떠오르면 한 잔 마시고픈 열망이 들들 끓지만 아무리 찬장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을 가끔 보았다. 며칠 전에도 바깥 활동으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믹스커피를 사고 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결국 슈퍼로 향했다. 그런데 20개들이 하나를 들어 올리니 온라인몰과 가격차가 무려 천 원이었다. 더 고민스러웠다. 어차피 몸에도 안 좋은 데다 가격도 비싼데 이걸 굳이 사야 하나 싶었다. 옆에서 나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둘째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엄마, 그렇게 마시고 싶은데 참지 말고. 그냥 눈 딱 감고 한 잔 마셔. 엄마는 마셔도 돼. 내가 사 줄게요."


아직 어린 내 아이의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 말에 담긴 사랑과 응원을 알기에 순순히 응했다. 이제 남은 믹스 커피는 18개. 나는 이것을 천금처럼 아낄 것이다. 힘들 때나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하나씩 타 먹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마음이 예뻐서. 그 한 잔에 담긴 사랑의 힘으로 말이다.


한스푼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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