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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Jul 02. 2021

'기준'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장소가 될 수도 있다.

기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중학교 체육시간이다. 초등학교 때엔 담임선생님이 거의 모든 수업을 도맡아 했지만 중학교 입학 후 첫 체육시간은 담임 선생님이 아닌 교문에서 봤던 무시무시한 선생님이 구령대 위로 올라왔다. 우리를 운동장에 모아놓고선 한 명을 지목하여 큰 목소리로 “기준!”이라고 소리쳤고 기준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는 우왕좌왕했다. 마치 예견했다는 듯 모두 '엎드려'를 시키거나 저쪽 축구골대로 뛰어갔다 오라는 선착순 뺑뺑이를 돌렸다. 40분 내내 엎드렸다가 뛰어갔다 하다 보니 기준이란 의미를 빠르게 이해시키는 가장 효과적이자 교육적으로 가장 최악의 방법을 썼지만 어찌 됐든 그런 추억이 새겨졌다.



‘기본이 되는 표준’ 이 기준의 뜻이라고 나와있다. 분명 중학교 때의 기준은 저렇게 멋지게 정의된 단어가 아닌 단순히 우리를 기합 주기 위한 체육선생님의 의도와 계획이 실현되는 단어였다. 힘들게 몸으로 터득했지만 군대에선 '기준' 보단 '개념' 이란 말이 더 중요했고 사회에선 '기본' 이란 단어가 더 중요하고 많이 사용됐다. 기준이라는 단어는 그저 평가하거나 심사할 때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제안서를 작성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 아니면 자신에게 뭔가 의미 있는 질문을 할 때 사용할 뿐 그 의미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백수에서 사회인으로 변한 지금의 나에게 기준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기준으로 지목된 학생이 움직이면 오와 열을 맞추기는 매우 어려우니 기준이 되는 학생은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행복이란 단어는 변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이라는 기준이 생기고 그런 삶을 위해 각자만의 방법으로 그 기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기준 이란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장소'였다.


장인어른 생신에 맞춰 처갓집에 가기 위해 휴가를 냈다. 한창 직장 생활할 때엔 허다하게 가서 그만 오라고 할 정도여서 뜸하게 가긴 했지만 갈 때마다 아이들을 맡긴다는 눈치는 보였어도 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꿈을 찾겠다며 바리스타로 지낼 땐 시간이 없어 못 갔다 쳐도 백수가 돼서는 명절 빼곤 못 갔다. 코로나 때문도 있었지만 실은 눈치가 보였다. 아내한테는 괜찮은 척 처갓집 놀러 가자고 당당하게 말을 했지만 마음속으론 꽤 많은 눈치를 봤다. 아이들을 맡긴다는 눈치보단 '남의 집 귀한 딸이 백수가 된 남편과 지내는 모습을 본다면 내가 부모라도 속이 터질 것 같은데 두 분은 어떨까?'라는 눈치가 보였다. 그걸 알면서도 뭐라고 할 수 없고 놀러 온다면 반갑게 맞이하겠지만 속은 그리 달갑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당당하게 내려가서 놀자 라고 말은 내뱉었어도 마음속은 전혀 당당하지 못했다. 아마 아내 역시도 그런 눈치가 보였겠지만 나한테는 한마디도 하진 않았다.

상황이 변해서 다시 옛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처갓집에 가려니 죄송한 마음은 있지만 백수일 때만큼의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처갓집이라는 장소는 변하지 않았지만 내 상황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쩌면 장소가 내 삶에서 기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주말이 되어 둘째 놈과 함께 콩순이가 나오는 마트로 갔다. 백수일 때는 물건 하나라도 저렴하고 양이 많은, 아니면 그냥 아이쇼핑만 하러 다니고 포인트 모으는 것에 연연했는데 수입이 생기다 보니 조금은 좋은 거, 약간 비싸도 맛있는 거,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을 사줄 때 고민 없이 사줄 수 있다 보니 분명 마트라는 장소는 변하지 않았는데 내 소비패턴이 변했다는 걸 알게 됐다.

장소는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 생활패턴과 생각, 마음이 왔다 갔다 했었다. 그러다 보니 기준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백수일 때 다녔던 모든 장소들을 지금 다니면서 변하지 않는 이 장소에서 변한 건 나뿐이었다.


지금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됐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요 2년간의 내 선택과 삶은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도 들지만 그 철없던 행동을 통해 새로운 걸 알고 배웠다.

뺑뺑이를 그렇게 돌리던 체육선생님이 꼴 보기 싫었지만 기준이라는 단어만큼은 몸으로 확실하게 터득한 만큼 현재의 삶이 힘들거나 어려워질 때마다 마음속 다짐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기 힘들다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런 장소들을 찾아가 다시금 기준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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