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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Apr 28. 2022

변하지 않는 것이 준 선물!

변한 건 나 혼자였다

 7살 때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처음 왔다. 골목길이 너무 복잡해서 집을 찾아오기가 어려웠고 잘못 들어가면 막다른 골목이 나오기도 했다. 주변 언덕은 어느 순간 나무가 뽑히고 평탄화 작업이 진행되어 아파트가 들어섰다. 동네 친구들은 어느샌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에서 뭘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골목길에는 그 추억들이 한가득 했다.


둘째 놈이 7살이 되면서 어린이집에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부가 나쁘지는 않다만 나와 아내는 공부보다는 좀 더 뛰어놀고 오감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더 선호했다. 그런 면에서 교육부의 과정을 따르는 유치원이 좀 더 매력적이었다. 둘째 놈 역시 한글이 서툴러서 배우기 어렵다고 집에 오면 온갖 심통을 다 부렸다.

아내는 고민을 했고 근처 병설유치원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병설유치원은 철저하게 교육부 과정을 따르기 때문에 한글을 가르쳐도 재밌는 활동으로 배우며 공부보다는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교육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째님이 이미 병설유치원을 다녔어서 그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첫째님이 다녔던 병설유치원이 가깝기만 했어도 이미 둘째 놈은 맨날 얼굴과 온몸에 흙을 묻히고 왔었을 것이다.

집 근처엔 5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어린이집과 집 근처 병설유치원을 두고 고민할 땐 유치원이 너무 일찍 하교했고 돌봄 교실이 지원되지 않아 아내가 일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지금은 둘째 놈의 교육, 아니 우리가 정한 교육방침을 위해 병설유치원을 다시 알아봐야 했고 다행히 돌봄 교실까지 신청할 수 있어서 어린이집과 하교시간이 비슷해졌다.

주저할 필요가 없이 바로 상담에 들어갔고 둘째 놈은 지금 매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갈 만큼 행복하게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내는 미안해했다. 어린이집 갈 때는 오늘은 안 가고 싶다고 하던 아이가 유치원에 가겠다며 준비하는 걸 봤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이의 상태를 잘 체크하면서 타이밍 좋게 잘 바꿨다며 난 아내의 센스에 박수를 보냈고 둘째 놈에게 말했다.

"둘째야! 네가 다니는 곳은 바로 아빠가 다녔던 학교야!"



출근할 때마다 그 초등학교 앞을 지나갔다. 예전엔 분식집이 즐비했고 맨날 떡볶이, 어묵, 떡꼬치, 튀김, 핫도그, 와플을 팔던 그 길이 잘 포장된 인도로 변했고 도로는 30km 이하라고 잘 표기가 됐다. 이맘때쯤이면 학교 담장을 넘어 장미꽃이 펴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그 초등학교를 난 생각 없이 지나쳤다.

출근시간은 정신없이 아이들 챙기고 등교버스 시간에 맞춰 뛰어다니며 첫째님을 겨우 등교시키면 서둘러 나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나서야 주변 풍경을 신경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을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다 오랜만에 연차를 내고 아내의 병원 정기검진을 위해 둘째 놈 등원을 맡아서 했다. 차에서 내려서 둘째 놈의 손을 붙잡고 후문으로 들어갔다.

후문에서 한 발짝 들어서니 머릿속에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면서 그때 봐왔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화단 가운데로 난 길은 고무줄 하는 여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거기엔 어김없이 고무줄을 가위로 자르고 도망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잡혀서 등짝 맞고도 좋다고 또 고무줄을 잘랐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을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한 그때의 수단은 어쩔 수 없는 '장난기' 밖에 없었다. 화단에는 그때에도 있던 큰 벚나무와 은행나무가 잘 버티고 있었다.

둘째 놈에게 여기서 고무줄을 했고 아빠는 그때 그랬다며 한껏 추억여행에 들떠서 혼자 중얼거렸다. 둘째 놈은 듣는 둥 마는 둥 제 갈길만 갈 뿐!

건물에 들어가니 발열체크를 하고 출입 명부를 작성했다. 건물은 2동인데 앞 건물, 뒷건물이라 통상 불렀다. 앞 건물은 1학년 때 있었고 2~4학년 땐 뒷건물에 있었다. 5학년이 돼서야 다시 앞 건물로 갈 수 있었고 6학년 땐 화장실 바로 옆 교실이어서 20대에 동창생 모임에서 '화장실 옆 동창생'이라는 표어를 만들어 만나기도 했었다.

뒷건물로 이동하는 중간에 아주 작은 방 하나가 알록달록 색칠돼있었다. 거긴 적금을 하던 곳이었고 한 달에 한번, 수요일이면 직원이 와서 창구처럼 자리에 앉아있으면 부모님이 주신 통장에 돈을 넣은 아이들이 줄을 서서 적금을 들었었다.

뒷건물 계단 역시 밋밋한 콘크리트가 드러났던 그때와 다르게 유치원에 온 걸 실감할 수 있는 색들로 칠해져 있었다. 교무실 벨을 누르고 선생님께 둘째 놈을 맡긴 다음 왔던 길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초등학교 시절을 한껏 상기했다.

2차 성장이 빠르게 와서 어른 같았던 무서운 친구는 같은 중학교에 올라갔는데 녀석의 키는 그대로였고 내가 더 커져서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싸움만 좋아하는 친구는 지금은 너무 아저씨가 되어 이제 싸움을 한다면 얻어맞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점심시간에 옆반과 축구대항전을 했는데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서 경기를 끝내고 눈치를 보며 교실 밖에서 선생님을 봤는데 대단히 화가 나서 문을 걸어 잠갔다. 복도에서 한 줄로 무릎 꿇고 있다가 5교시 끝난 후 선생님이 복도에 나와 "이겼어? 졌어?"라고 물어봤다. 바로 옆반과 대결했기에 조용하게 "이겼어요"라고 거짓말하고는 교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주말에 서울랜드로 친구 한 명과 놀러 갔다. 집에다가 어디 간다고 말도 안 하고 놀러 갔다 밤 10시가 돼서 집에 왔고 친구 집과 우리 집은 난리도 아녔다. 당시 그 친구 아버지는 택시기사라 거짓말 보태서 전국의 택시기사에게 아들 사진 보여주며 이런 애가 오면 당장 연락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다음 날 반에서 아주 유명인이 됐다. 부모님들이 반 애들에게 일일이 전화했으니! 친구들은 어디 갔다 왔냐며, 뭐했냐며 궁금해서 물어봤고 신나게 대답하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온 순간부턴 아주 호되게 혼났었다.

그런 추억을 곱씹으며 후문을 나오는 순간부터 현실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학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변한 건 흰머리가 나온, 키도 컸고 배도 나온, 나이 든 두 아이의 아빠인 나 밖에 없었다. 그땐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참 그 시절은 행복했었다. 그리고 지금 잠시나마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해 줘서 고맙고 잠시 행복했다.

변하지 않는 건물, 그것이 나에게 잠깐의 행복을 선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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